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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겁나는 도로, 보행자 위주로 바꿔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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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13면

여기 한 여인이 있다. ‘걷기’는 그의 오랜 취미이자 운동이다. 아침에 일어나 한 시간씩 5㎞ 남짓 산책을 한다. 출근해서도 업무 시작 전이나 점심 때를 이용해 인근 거리를 걷곤 한다. 그러나 곤욕의 연속이다. 보도블록에 구두 굽이 끼여 부러지기 일쑤다. 길 중간의 지하철 환기구와 전신주, ‘개구리 주차’된 승용차, 입간판, 자동판매기… 도시의 인도를 걷는다는 건 숨가쁜 장애물 경주와 같다. 보도는 육교와 지하철 출입구에 점령당해 더욱 비좁다.

교통사고 사망 중 보행자 비율 40%로 OECD 최고 … '보행환경기본법'제정 추진

길에 대한 ‘짜증’이 ‘분노’로 발전한 계기는 2002년 6월의 ‘효순이 미선이’ 사건. 도로 갓길을 걷다 미군 차량에 치여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접한 여인은 그 도로에 인도가 없었다는 데 더 격분했다. ‘차를 피하려고 해도 피할 곳이 없었다니...’ 목숨 걸고 걸어야 하는 우리 도로의 현실. 사회안전망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다는 문제 의식이 싹텄다.

여인은 바로 신명(열린우리당) 국회의원. 그는 지난 2월 비례대표로 의원직을 승계받자마자 ‘보행환경 개선’ 태스크포스팀 구성에 들어갔다. 신 의원은 노동부 고용평등국장을 거친 노동관료 출신인 자신이 보행 문제 개선에 나선 데 대해 “안전하고 쾌적하게 걷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도 없는 국도나 지방도가 너무나 많습니다. 지방에선 노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 차에 치여 숨지고 있어요. 지난 30~40년간 산업화 과정에서 교통정책은 차량 소통 위주였습니다.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지요. 이제 거리를 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 놓고 생활하는 공간이라는 인식 전환이 시급합니다.”

신 의원의 지적대로 우리의 교통법률 시스템은 보행권을 철저히 외면해왔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서울을 비롯한 지방자치단체들이 보행 조례를 제정했지만, 보행 환경이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통안전법 8조를 보세요. ‘보행자는 육상교통에 위험과 피해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을 정도예요. 차가 사람에 우선한다는, 잘못된 상식을 깨야 합니다. 가로등, 보도블록, 가로수, 전신주, 환기구같은 보도 시설물이 100여 종이 넘고 관리부서도 시청, 구청, 지하철공사, 한전 등 22개 부서로 나눠져 있는데요. 이들 시설물과 보도 설치기준을 통일적으로 관리하려면 기본 법률이 있어야 해요.”

신 의원은 교통 전문가와 시민단체, 행정자치부 등이 참여한 TF팀 회의를 10여 차례 가진 끝에 ‘보행환경 기본법’(가칭) 제정을 추진키로 했다. 8월 말 공청회를 거쳐 9월 정기국회에 법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법안의 골자는 국가와 지자체가 보행자 안전과 편의를 제고할 수 있는 기본 계획을 수립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과제로는 보행자 우선 도로와 횡단보도 확대, 보도 구조 개선이 꼽힌다.

‘녹색교통운동’을 주도한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TF팀에 참여 중인 한양대 임삼진(교통공학과) 교수는 보행자 우선 도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임 교수가 대표로 있는 녹색도시연구소의 분석 결과 우리나라 교통사고 사망자 중 보행자 비율은 2005년 39.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다.

“인구 10만 명당 5.28명이 길을 걷다가 숨지고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보행자들의 지옥이에요.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선 유럽처럼 보행자 우선 도로를 만들어야 합니다.”

독일과 네덜란드에선 이면 도로와 왕복 2차로 미만 도로는 대부분 보행자 우선 도로로 지정돼 있다. 특히 독일 도로교통법은 보행자 우선 도로에선 ▶보행자가 도로의 전 영역을 이용하고 ▶차량 속도는 걸음걸이 속도를 유지하며 ▶자동차 운전자는 보행자를 위험하게 하거나 방해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관광도시인 프라이부르크에선 도로의 78%가 보행자 우선 도로다.

“지금도 덕수궁길처럼 보행우선 도로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전시성 시범사업입니다. 골목길이나 아파트 단지 내 도로 같은 생활도로는 보행자 우선 도로로 정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게 해야지요.”

역시 TF팀에 소속된 경원대 정석(도시계획학과) 교수는 횡단보도 확대 설치와 보도 구조의 평탄성·연속성 확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서울시 시정개발연구원에서 13년간 도시설계를 연구해온 정 교수는 도로교통법 시행규칙 11조의 문제점부터 지적한다.

“횡단보도는 육교·지하도 및 다른 횡단보도로부터 200m 이내에 설치해선 안 된다고 못박고 있어요. 물론 97년 ‘특히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설치할 수 있도록 예외규정을 뒀지만 여전히 횡단보도 확대를 막는 독소 조항입니다. 반면 보행자를 위해 횡단보도를 어떻게 만들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은 전혀 없습니다.”

서울 4대문 안 모든 교차로에 횡단보도를 두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끊기지 않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어야 관광객들이 서울을 찾게 되고, 그래야 국제 경쟁력 있는 도시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외국인들에게 보도는 그 도시의 얼굴”이라며 “횡단보도를 보도 높이로 높여 과속방지턱 효과를 내는 한편 횡단보도 부근은 차도를 좁히는 등 안전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유모차를 끌고 얼마나 편하게 다닐 수 있느냐가 보행 환경의 척도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니는 곳은 상권도 살아나지요. 단순히 장애인이나 보행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본법 제정은 보행 혁명(革命)의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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