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예언자-순화동 편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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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02면

이번 주에 온 우편물 중 압권은 두툼한 책 꾸러미였습니다. 700쪽 남짓한 책 3권이 묶음으로 왔는데 한 손으로 들기가 힘들 지경이었죠. 한동안 신간 출간이 머츰하다 싶었던 출판사였는데 이 ‘괴물’을 만드느라 그랬나 봅니다.

문제의 책은 아이작 도이처(1907~67)의 ‘트로츠키 3부작’(도서출판 필맥 펴냄)입니다.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의 삶을 다룬 고전이지요. 『무장한 예언자 1879~1921』(사진)『비무장의 예언자 1921~1929』 『추방된 예언자 1929~1940』로 이뤄진 전기입니다. 22년 전 두레출판사에서 낸,『무장한 예언자』의 전신인 『트로츠키, 한 혁명가의 생애와 사상』을 기억하기에 옛 임 본 듯 반가웠습니다.

책을 만나는 방법은 나름 다를 겁니다. 2000쪽이 넘는 양으로 독서 의욕을 압도하는 이런 대작은 비교적 짧다고 할 수 있는 지은이의 머리말이나 옮긴이의 후기를 우선 읽는 게 수입니다. 『무장한 예언자』의 역자인 김종철씨는 독자를 1980년대 한국 상황으로 데려갑니다.

“당시만 해도 이런 종류의 책은 ‘불온서적’으로 몰릴 수 있으므로 재야 운동단체 대변인을 맡고 있던 내가 역자로 이름을 거는 것은 적절치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분 역시 부담을 질 게 뻔한데도 나는 염치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런 연유로 이 번역서는 ‘역자 신홍범’으로 19년을 보냈다.”

신홍범씨는 당시 이 책을 냈던 두레출판사의 사장이었습니다. 불과 십 몇 년 안짝이지만 그때는 이런 일이 참 많았습니다. 이래저래 제 이름을 당당히 밝히지 못하던 사람이 꽤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잃어버린 이름’을 찾은 내력을 읽어서인지 이 책의 이런 구절이 더 가슴에 와 닿는지 모르겠습니다.

“독자들은 정치적인 서술에서 흔히 ‘휴먼 스토리’로 불리는 이야기로 거듭 눈길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서 트로츠키 가족의 삶은 트로츠키의 정치적 운명과 분리될 수 없다. 가족의 삶은 트로츠키의 투쟁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고, 그의 드라마에 엄숙한 깊이를 부여한다.”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주역이었지만 그 뒤 당내 권력 투쟁에서 스탈린(1879~1953)에게 패해 축출되고 끝내 망명지 멕시코에서 암살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요. 후에 소련 공산당 총리 흐루시초프(1894~1971)는 스탈린에 대한 비판과 트로츠키의 복권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말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당 밖으로 나가도록, 특히 언론으로 새어 나가도록 방관해서는 안 된다. 적의 눈앞에서 우리의 더러운 속옷을 빨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을 듣고 아이작 도이처는 이렇게 논평했다지요.

“더러운 속옷을 소련 민중의 등 뒤에서 빠는 일을 오래 계속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일은 곧 민중의 앞에서, 그것도 밝은 대낮에 이루어질 것이다. 어쨌든 그 더러운 속옷에 배어 있는 것은 그들의 땀과 피다. 그것을 세탁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릴 것이고, 아마도 그 일을 시작한 자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 다시 말해 보다 젊고 깨끗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완수될 것이다.”

트로츠키는, 아이작 도이처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보의 ‘순례’를 촉진하는 게 자기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모욕당하고 짓밟히고 악당 취급을 당해도 그 ‘휴먼 드라마’는 멈출지 모릅니다. 엄청난 분량의 책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읽기 시작합니다. “수동적인 복종, 권위에 의한 기계적인 평등화, 개성의 억제, 굴종의 태도, 출세주의를 버리십시오.” 단 몇 줄을 읽다 덮는다 해도 올 여름 휴가는 이 책 세 권을 끼고 지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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