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가리는 눈(雪)의 장막-조엘 코엔·에단 코엔의 ‘파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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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13면

이랜드 파업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다. 한나라당 경선은 갈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 혹자는 차기 정부의 비리가 먼저 터지는, 기이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킥킥거리며 말하고 있다. 이 무슨 대입시험 대비 핵심논술 요약인가 싶겠지만, 오늘 이야기할 영화가 ‘파고’이다 보니 뭐 그렇게 시작해도 무방할 듯싶다. 모두 지금 이 세상에 내리고 있는, 혹은 내려버린, 폭설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소설가 이기호의 시네마 노트

‘파고’는 눈에서부터 시작해 눈으로 끝나는 영화라 말해도 좋을 만큼 천지사방, 스크린 가득, 새하얀 폭설로 뒤덮여 있다. 아내를 납치하는 남편의 배경에도, 남편의 사주를 받은 칼과 게어가 가는 길에도, 칼과 게어가 우연히 경찰을 죽이고 목격자를 죽이는 국도변에도, 눈은 소담스럽고 푸근하게 내리고 있다. 이야기는 갈수록 꼬이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그래서 결국 사료분쇄기에 사람을 집어넣고 죽이는 엽기적인 장면까지 나오고 마는데, 사위를 감싼 눈 때문인지 그 모든 것이 한낱 풍경이 되고, 보기 좋은 흑백사진이 되고 만다. 핏자국도 감추고, 살인무기도 감추고, 시체도 감추고, 돈마저 묻어버리는 눈. 스릴러를 스릴러가 아닌, 일상으로 바꾸는 눈.

그러나 다시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 눈 때문에 이 스릴러는 더 섬뜩해지고 두려운 무엇이 되고 만다. 우리를 둘러싼 풍경들의 이면에는, 어딘가에 시체가 묻혀 있고, 핏자국이 숨겨져 있다는 방증. 그리고 그것들을 외면하고 가리는 것이 다름 아닌 우리라는 사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진실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눈이라는 진실 말이다.

그 눈으로 뒤덮인, 눈으로 가려진 진실을 까발리는 것은 여자 보안관 맥이다. 영화에서 맥은 만삭의 상태로 나온다. 수퍼히어로가 아닌, 뒤뚱뒤뚱 자신의 배를 움켜쥐고 걷는 임부 맥. 그녀는 눈 속에 감춰진 핏자국을 찾아내 하나하나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모든 것이 눈 속에 파묻혔지만, 조금만 파헤쳐 보면, 너무도 쉽게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 그 어떤 잔혹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임신부의 손으로도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것. 그러니 맥 또한 우리의 분신이다. 그 분신을 통해 코엔 형제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얼마나 눈 속을 파헤쳐 보았느냐, 눈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관심이나 두었느냐.’

이랜드 사태나, 경선 주자들의 박 터지는 싸움이나 일반인에겐 그저 강 건너 내리는 눈이나 다름없다. 너무 많이 보아서, 너무 많이 쌓여서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는 눈. 그 속에 어떤 ‘가치’가 충돌하고 있는지 아무도 제 손을 얼려가며 파헤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린 어쩌면 공범자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눈 속에 파묻으며, 언제까지고 불편한 진실과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푹푹 찌는 여름이지만, 온 세상이 폭설에 뒤덮인 듯 고요하기만 하다. 우리는 폭설처럼 늘 조용하기만 하다. 우린 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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