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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54년 황금찬씨 35번째 시집 "삶은 전쟁 … 시 쓰며 이겨 왔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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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포도나무가 열매를 안 맺으면 그게 포도나무인가. 시인도 시집을 내야 시인이지.”

문단 최고령 시인 황금찬(89·사진)씨가 35번째 시집 『공상일기』(문학사계)를 내놨다. 서울 혜화동 한 찻집에서 시인을 만났다. 갈색 정장 차림에 멋스럽게 베레모를 눌러쓰고 원로시인은 나타났다. “또 시집을 내셨네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시인은 “창작이 시인의 도리 아니냐”며 싱긋 웃었다.

한 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 내내 그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구순이란 나이는 그 앞에서 무색했다. 시인은 “오래 살겠다는 욕심을 버린 게 건강 비결”이라고 말했다.

‘임방울이/ 쑥대머리를 불렀을 때/ 환상의 새들이 날아와/ 구름이 젖도록 울었다고 한다./ 오페라 나비부인 중의/ 아리아/ 어떤 개인 날을/ 마리아 칼라스가 불렀을 때/ 나비 열 마리가 날아와/ 춤을 추며 울다가 날개를 접었다.’(‘쑥대머리’ 부분)

그는 이번 시집에서 애정이 가는 작품으로 ‘쑥대머리’와 ‘그 집 앞’을 꼽았다. 두 편 모두 그가 만났던 사람을 떠올리며 쓴 작품이다. 특히 ‘쑥대머리’는 판소리 명창 임방울 씨와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를 대비한 것이다.

시인은 “임방울 씨가 판소리 대회에 나왔을 때 차림이 남루하다고 다들 무시했다”며 “그러나 그가 노래를 불렀을 때 감동을 안 받은 사람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실력 있는 명창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시를 통해 불러냈다는 것이다.

황금찬 시인은 올해로 등단 54년을 맞았다. 반세기 넘게 시와 더불어 산 시인에게 시는 무엇일까.

“시는 개개인이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이죠.” 시인은 시에서 삶의 전법(戰法)을 배웠다고 말했다. 언어 순화와 정서 정화, 생활의 예지 등이 그 전법의 예다.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연습이 있다며 지하철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동료 문인들과 문인극을 하거든요. 이번엔 대사가 없는 단역이지만 지금 또 연습하러 갑니다.” 시인도 모자라 배우까지. 시인 황금찬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글=이유진 인턴기자, 사진=김태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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