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사 서봉수(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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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요즘 한창 화제의 초점을 이루고 있는 슬롯머신은 인간을 상대로 하는 도박기계다. 슬롯머신을 둘러싸고 거액의 뇌물이 오가거나 정치문제로까지 비화한 까닭은 승부조작이 가능할뿐더러 조작하지 않더라도 승부에 있어서는 인간이 결코 기계를 이길 수 없어 「돈만드는 기계」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기 때문이다.
사람과 컴퓨터가 바둑대결을 벌인 결과 아직까지는 컴퓨터가 인간을 이길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프로그램 개발 여하에 따라서는 언젠가 컴퓨터가 인간을 이기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래서 승부의 원리를 터득한 사람들은 기계와 승부를 벌이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자랑할만한 프로 기사 서봉수9단은 기계와의 승부도 마다하지 않는다. 승부벽이 남다른 그는 「기계와의 승부」에까지 몰두하는 까닭을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승부의 세계에 몸담기 위해서는 지는 방법부터 터득해야 한다. 기계는 그것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기계를 잘 구슬러 내 편을 만들면 승률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그는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모든 승부는 정신적인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냉혹한 승부세계에서는 운수같은 것은 결코 용납되지도 작용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어떤 정신자세를 가지고 승부에 임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실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정신자세만 갖춰진다면 바둑에 관한한 이 세상의 어느 누구와도 해볼만 하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렇게 보면 그가 응씨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의 강자 오타케9단을 물리치고 세계정상에 우뚝 선 것은 우연도 아니요,운수가 좋았던 탓만도 아니다. 20일 열린 제5국을 「무아의 경지」에서 두어나갔다는 그 자신의 소감은 그가 늘 말하는 「마음을 비우고 둔다」는 자세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때로는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대국표정도 그같은 정신자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별명처럼 붙어다니는 「순국산」의 특징이자 강점일는지도 모른다. 이번 서봉수9단의 세계제패는 일본 바둑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순국산」의 개가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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