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78년 소 무르만스크 불시착-전 KAL기장 김창규씨|"항로 이탈 왜 모른체 했는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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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경고 한마디 없이 미사일 요격을 받아 공중 분해될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구멍이 뚫려 기압이 급격히 떨어진데다 방향타마저 잃은 기체를 끌고 동토의 호수로 뛰어들던 순간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78년4월20일 구소련 영공을 월경, 미사일 요격을 받아 무르만스크 남쪽 얼어붙은 호수에 불시착한 뒤 일시 억류됐다가 5월초 귀환했던 대한항공 파리발 서울행 보잉 707기 수석기장 김창규씨 (60)는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아직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솟는다고 말했다.
올해 회갑을 맞아 정년 퇴직한 김씨는 1남 3녀의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서울 송파구 신천동 장미 아파트에서 부인 이종선씨 (59)와 단출하게 살고 있다.
현재 인천의 대한항공 훈련원 교관 (촉탁)으로 근무하는 그는 미소 양극의 대치 상황에서 소련의 해군 함정들이 몰려 있는 예민했던 군사 기지 무르만스크에 불시착했던 일들이 지금까지도 부분적으로 의혹 속에 싸여 있다고 15년만에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소련 국경 수비대에 끌려가 분리 심문을 받아야 했던 그는 숱한 질문 공세를 받았지만 정규 항로에서 90도 이상 꺾어 운항된 과정을 자신도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관성자동항법장치 (INS)가 부착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자극권역에 있는 북극항로에서는 자이로컴퍼스에 의한 항법사의 주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몇가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고 덧붙인다. 『당시 이륙 후 아일랜드와 그린랜드 쪽으로 빠져나간 다음 항법사가 평소와 달리 네차례에 걸쳐 모두 90도 정도를 오른쪽으로 꺾도록 주문하더군요. 뭔가 이상하다 싶어 다시 물었어요. 그러나 항법사는 틀림없이 계기에 오차가 난다면서 오히려 화를 냈어요. 지상 지형물들이 차이가 났고 그린랜드에 있는 지상 확인 장치와도 연결이 안돼 인근 항공기들과 교신을 시도했어요. 당황하고 있을 즈음 불이 밝게 켜진 도시 무르만스크가 보였고 잠시 후 레이다에 소련 전투기가 나타나더군요.』
이처럼 오른쪽 날개 후미에 잠시 나타났던 소련기가 국제 항공 관례와 상식을 무시한채 미사일 공격을 가한점, 요격을 받기 전에 노르웨이 최북단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전진기지와 두차례 타전이 됐을때 전진기지에서 『계속 진행해도 좋다』고 답신한 점등은 지금도 수수께끼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그는 귀국후 미 정보 요원을 만났을 때 『귀하는 운이 몹시 좋았다』면서 『당시 소 전투비행대 팀장은 술 마시러 나갔고 당황한 조수만이 단독 출격, 서투르게 요격해 미사일이 빗나갔다』는 등 상황을 소상히 아는 것을 보고 「어쩌면 위기 상황을 알면서도 사전 조치가 없었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소련의 대공방위 망을 시험하기 위한 희생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강한 의혹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또 우리 정부 당국이 일절 발설을 금지시킨 것도 이해되지 않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한쪽 날개가 부서져 나간 위기 상황에서 착륙할 때 사용했던 방법은 당시 보도처럼 동체 착륙이 아니라 정상 착륙이었다. 랜딩기어를 내린채 수심을 모르는 호수 한가운데를 피해 간신히 비상 착륙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는 미사일 파편으로 두명의 승객이 절명했지만 미사일 불발과 착륙때 쌓여 있던 눈이 제동 기능을 해주는 등 행운이 겹쳐 불행 중 다행으로 기체가 언덕받이에 비스듬이 걸쳐지면서 승객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되새겼다. 그는 79년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미 조종사 협회가 주는 「최우수 조종사상」을 수상한 영예를 고인들에게 바치고 싶다고 했다.
51년 갑종 간부 후보 3기로 입대, 66년 육군 항공대에서 소령으로 예편한 후 69년부터 올 2월 정년 퇴임까지 대한항공에 근무해온 그는 무르만스크 불시착을 제외하면 모두 2만4천 시간을 무사고 운항했다. 지금도 당시의 승무원·승객들과 소식을 주고받는다면서 그는 여유가 생기는 대로 회고록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배유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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