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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꿈」 위해 박사 포기한 인류학도|"우리 영화 가능성 무한하다"|『서편제』 조 감독 김홍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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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26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에서 조감독으로 활약한 김홍준씨 (37)는 영화가 개봉된 후 심한 몸살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긴장이 풀린 탓인지」 며칠간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고생해야만 했다.
그러나 실상 그에게 더 부담스런 것은 몸살보다 『서편제』의 성공이 뜻밖에도 그에 대한 세간의 갑작스런 관심을 몰고 왔기 때문이다. 『서편제』가 한국 영화로는 보기 드문 기술적 완숙도에 도달한 영화가 된 것엔 그의 공헌이 적지 않다는 주위의 칭찬이 쏟아지면서 그는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가 일류 대학을 나온 수재일 뿐만 아니라 연출자로는 보기 드문 단단한 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수군거림이 더해지면서 그는 더욱 답답함을 느껴야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것일수 있는 것이라도 그냥 지나쳐선 안된다』는 생각에서 열심히 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작품의 성공은 전적으로 임권택 감독 몫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겸손에도 불구하고 임 감독의 그에 대한 믿음은 대단하다. 사석에서 『얘가 내 선생이오』라고 말할 정도니 그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는 쉬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어쨌든 그가 판소리 자료 수집에서 촬영 준비, 심지어 영화제 출품을 위한 번역 작업까지 도맡아 해내면서 그 숨은 역량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 것 또한 사실이다.
김씨의 이력을 훑어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굳이 영화라는 「예술 노가다」를 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사람이다.
경기고·서울대 인류 학과를 나왔고 미국 템플대에서 영상 인류학 박사 과정까지 마친 그는 말하자면 전형적인 우등생의 길을 걸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재로서의 겉모습 내면에는 일찍부터 영화에 대한 거의 광적인 사랑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고교 시절 그는 외국 문화원의 단골 손님이었다. 대학 시절 8㎜영화를 만들어 청소년 영화제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80년대초에는 영화 서클에 몸담으면서 이 땅의 역사적 현실을 담을 수 있는 대안적 영화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기괴한 「문화적 금욕주의」가 지배하던 70년대는 외지에서 접하는 걸작들을 본다는 것이 거의 꿈같이 생각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많은 젊은이들은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프랑스 문화원이나 독일 문화원을 기웃거렸고 책에서만 보던 영화를 직접 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쭐해하던 시대였다. 그는 외국 문화원을 드나들면서 이 문화적 진공 상태로 인해 생긴 허기 (?)를 서구 영화라는 「달콤한 유혹」으로 채우고,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사회 과학의 세례를 받으면서 「철없던 성장기」를 회개해야 했던 첫 세대에 해당된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매력적인 모험에 무작정 자신을 투사시키기에는 이 사회가 너무나 많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음을 안 세대인 것이다.
영화란 매체가 사회에 대해 갖는 책임이란 무엇일까를 놓고 고민하던 그는 83년 미국으로 떠난다. 그간의 작업이 영화광 특유의 치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한 그는 공부를 계속하면서 자신을 다잡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결국 영화와 관련된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계속 그를 괴롭혔고 마침내 그는 7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에는 마땅한 직업 없이 낭인 생활을 해야했던 그는 이 기간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 「자신을 한번도 평론가나 이론가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영화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쓴 글들은 나중에 『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가지 것들』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발간됐다.
한울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영화책도 스테디셀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책이 된다. 『체계없이 쓰여진 영화 정보의 묶음』이라는 그의 자평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1만부 넘게 팔리면서 지금도 영화 지식의 대중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90년말 지인의 소개로 『개벽』을 제작중이던 임 감독의 연출부에 들어가면서 그는 드디어 「항상 가까이 하기엔 어딘가 두렵게 느껴지던」 충무로에 들어서게 된다. 2년6개월 정도의 현장 경험을 통해 그는 이른바 「충무로 시스팀」에 대해 좀더 현실성 있는 안목을 얻게된다.
충무로가 갖고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충분히 탐사하는 것이 현재로선 한국 영화의 급선무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 정도의 인력을 가지고 있는 영화 제작 공간은 세계적으로도 그리 흔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고, 그러므로 문제는 이 인력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는 허점 투성이라는 통념에 대해서도 그는 제작 여건에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대부분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라고 본다. 『어차피 「터미네이터」 같은 영화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므로 현재 인력으로 대부분은 해결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 그는 자신의 감독 데뷔작으로 어떤 작품을 택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서구 영화가 보여준 풍요한 문화적 공간에 누구보다 매료됐던 그지만 자신의 첫 작품이 대단한 예술 작품으로 보이기 보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것은 충무로의 상업주의적 압력에 그가 타협했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관객과의 생산적인 대화 공간으로서의 영화의 가능성을 믿는 그로서는 영화의 대중성이 어느 정도 재미에 기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싸구려 영화관과 로큰롤로 얼룩진 젊은 혼의 방황을 그린 독일 감독 빔 벤더스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에 열광하던 20대 초반의 영화광은 이제 30대 후반의 영화 작가로 변모하려는 시점을 맞이했다.
그의 데뷔작은 아마도 그가 영화란 길에 들어서는데 거쳐야만 했던 오랜 방황을 정직하게 반영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임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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