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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8. 대운(大運) 서막 -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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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CT의 비밀을 벗기기 위해 컴퓨터 언어인 포트란으로 프로그램을 짜기 전 흐름도. 

 교수회의를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온 나는 크게 후회했다. 괜한 호기를 부린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컴퓨터단층촬영(CT)의 비밀을 벗기지 못하면 미국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에서 웃음거리가 될 판이었다. 그러나 나중 일이지만 그렇게 쉽게 마음 먹고 호기를 부린 것이 결과적으로 내 연구 인생에 탄탄대로를 열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줄은 몰랐다.

 대다수 교수는 각자 자신의 일에만 몰두한다. 하지만 남을 평가하거나 흠 잡을 일이 있으면 덩달아 나서는 교수도 적지 않다. 새파란 동양인이 여러 사람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선 어느 순간 꼬리를 내린다면 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건 뻔했다. 더구나 나를 유능한 과학자라고 추천해 UCLA로 불러준 예서 박사를 볼 낯이 없을 것이다. 아무도 그런 내 기분을 알 턱이 없었지만 정말 마음속으론 긴장했었다.

 전의(戰意)를 다졌다. 미국 원자력연구위원회에서 받은 과제인 ‘타임 오브 플라이트(TOF)’ 연구도 일단 제쳐뒀다. TOF는 방사선의 일종인 감마선이 날아가는 속도를 알아내 영상을 만들 수 있는 양전자 카메라 개발이다. 나는 대학과 연구실의 연구 시설을 점검했다. 실험실에도 가봤다. 여기저기를 뒤져봤지만 책상에 가득한 전공서적과 기본적인 실험기기들 외에는 CT의 비밀을 푸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실물 CT를 사다가 분해해 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25만 달러나 하는 CT를 살 돈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때 스웨덴에서 연구할 때 쓰던 컴퓨터 모의실험(시뮬레이션)용 단말기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UCLA 중앙컴퓨터실에는 대형 컴퓨터가 있었다. 지금의 개인용 컴퓨터(PC)와는 다르다. 중앙처리장치(CPU)가 내장돼 있고, 기억 용량을 나눠 쓰는 컴퓨터였다.

 “바로 저거다. CT의 기본은 수학이니까 수학적인 해법(알고리즘)을 찾아보자. 나는 컴퓨터에도 자신 있지 않은가.”

 당시 컴퓨터 언어인 포트란으로 학생들과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다. 내 특기인 컴퓨터 모의실험(시뮬레이션) 기법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CT의 기본은 X선을 이용하는 것이다. X선이 인체에 들어가 반사되거나 통과하면서 나타나는 음영(陰影)이 실제로 생기는 것처럼 컴퓨터 모의실험용 프로그램을 짰다. 실물 CT로 찍은 것과 같은 영상이 나타나도록 했다.

 CT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과 도구가 결정됐으니 절반의 성공은 거뒀다는 확신이 들었다. 목표가 정해지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달리는 덴 이골이 난 나였다. 중간중간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마침내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프로그램은 우편엽서만 한 크기의 카드에 구멍을 내야 컴퓨터에 입력할 수 있었다.

 가끔 학과 동료 교수들이 “잘 되어 갑니까”라며 던지는 의례적인 인사가 내 각오를 더욱 단단하게 했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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