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술·담배 과소비국의 「책의 해」/이어령(시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숫자는 때로 어떤 웅변보다 우리의 가슴을 치는 경우가 있다. 아태경제사회위원회의 보고서에 나타난 국가별 가계 소비수준을 비교한 지수도 그런 예의 하나가 될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얼마나 늘었는가 하는 숫자는 뜬구름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같은 소비 지수의 비교 숫자는 내심으로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던 것들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실감있게 피부에 와 닿는다.
○적정소비수준의 2배
한국·일본·홍콩·대만 등 아시아 네나라 가운데 한국이 그 첫째 손가락으로 꼽히고 있는 과소비 품목을 보면 담배와 술로 되어 있다. 각국의 국내총생산(GDP)에 적정한 소비수준을 1백으로 하여 지수화한 것으로 그 숫자가 1백을 넘으면 과소비가 되는데 한국의 담배소비는 1백59,술은 1백91이나 된다. 그러나 이 숫자를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그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담배의 경우 일본은 86이고 대만은 72,그리고 홍콩은 겨우 55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가 과소비의 위험선인 1백이하에서 밑돌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거의 두세배가 넘는 높은 지수의 봉우리로 솟아있다.
술의 경우 홍콩은 81로 1백 이하에 머물러 있고 일본과 대만은 과소비 선을 넘어 1백29,1백47을 각기 기록하고 있지만 2백 가까운 우리나라에 비하면 한참 구름 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충격은 태워없애고 마셔 없애는 과소비의 경제문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왜 우리는 남보다 많은 담배를 피워야 하며 어째서 남보다 더 많은 술을 마셔야 하는가 하는 생활 심리와 그 문화적 환경이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술·담배의 과소비는 우리가 그만큼 긴장도가 높은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반증이며 동시에 그 긴장감을 풀수 있는 문화적 공간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숫자이기도 한 것이다.
더구나 우리 나라의 소비수준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은 술도 담배도 아니라 5.2배를 기록하고 있는 바로 직물이라고 하니 더욱 예삿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경제분석가들은 이렇게 직물이 지나치게 높은 소비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4계절이 뚜렷해 옷에 대한 수요가 큰 탓도 있지만 혼수 등 옷에 대한 치장을 많이 하는 사치풍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긴장도 높은 사회 반증
술·담배·옷치장의 이 과소비 현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응책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 역시 우리는 그 통계지수의 표 속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가계소비지수의 비교 항목 중에서 도서·신문 구입비란으로 눈을 돌려보면 된다. 놀랍게도 네 나라 가운데 지수 1백선을 넘지않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일본이 1백55,홍콩이 1백56,대만이 1백6인데 우리는 1백의 반밖에 안되는 수준에서 턱걸이를 하고 있는 60이다.
술·담배,그리고 옷을 사입는데는 1등 과소비국인 한국이 책을 사보고 신문을 구독하는데 있어서는 1등 구두쇠 나라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비의 나라 한국이며,책의 해를 선포한 한국이다. 사치스런 옷을 입고 거리를 헤매고,술집을 기웃거리고,할 일이 없으면 담배나 피워대는 사람들일수록 책과 담을 싼 사람들이 많다. 그 증거가 바로 아시아 네 나라의 소비수준 비교표에 숫자로 나와 있다. 도서의 과소비국은 술·담배의 과소비국이 아니고 술·담배의 과소비국은 도서의 과소비국이 아니라는 원리가 일목요연하게 나타나 있다.
스웨덴에서 스키 때문에 골절상을 입고 입원하는 환자가 급증하자 책을 읽자는 캠페인이 벌어졌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스키와 책은 아무 연관이 없는듯 보이지만 그들의 논리를 들어보면 그렇지가 않다. 집안에서 독서하는 사람이 늘면 스키인구가 그만큼 줄고 스키인구가 줄면 그만큼 골절환자가 준다.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오일파동당시 자동차를 타고 놀러다니지 않는 사람의 독서율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는 이야기도 있고 보면 단순한 우스개 이야기로 흘릴 것은 아니다.
○독서 생활화 서두르자
올해는 책의 해. 지금 서울 도서전도 열려 여러가지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과소비를 하려거든 이 기회에 도서와 신문구독의 과소비국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담배와 술,그리고 옷치장을 하는 속빈 한국인의 생활양식에 반드시 변화의 새 바람이 불게 될 것이다.<문학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