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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저항 받는 후계체제(중)|군·사법부 수뇌들 줄줄이 "산골"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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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76년 6월초 노동당 중앙은 「김동규 파동」에 휩싸였다. 김일성·김정일의 입장에선 빨리 끄지 않으면 안될「발등의 불」이었다.
전 북한고위관리에 따르면 후계체제에의 도전이 터져 나온 정치위원회 회의 며칠 뒤에 다시 정치위원회가 열렸다. 「김동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회의에서 국가부주석 김동규에게 자기비판을 시켰으나 완강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공식회의에서 「자기비판」을 끌어 낼 수 없자 김일·최현·박성철 등 원로급 지도자들이 개별적으로 그를 만나 설득하려 했다.
그는 계속 『김정일 후계체제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방법상 고쳐야할 점이 많다』며 김정일의 간부정책이 당의 통일단결을 해친다는 비판에서 한발도 물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회유와 설득이수포로 돌아간 며칠 뒤 금동규를 비롯, 소극적이나마 그를 지지한 이용무(군총정치국장) 유장식(정치위원회 후보위원) 지경수(당 검열위원장) 지병학(인민무력부 부부장) 등이 차례로 국가보위부에 끌려갔다.
「보위부 조사」와 함께 당 검열위원회에서의「사상검토」도 시작됐다. 얼마 뒤 사석에서 『김동규 말이 옳다』고 밝히고 이용무 처지에 동정을 보인 장정환(인민무력부 부부장,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의 삼촌)도 문제됐다.
일본의 스즈키 마사유키 교수(성학원대학)는 이무렵 군 수뇌부의 「당중앙」즉 김정일 지도에 대한 언급에 차이가 있었다고 분석한다(『북조선‥사회주의와 전통의 공명』,-백12쪽). 75년 5월께 오진우 군 총 참모장과 서철 당 정치위원은 당중앙에 대한 충성을 호소했으나 인민무력부 부부장 지병학은 당중앙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상검토에 시달리다 못한 지경수는 76년 8월25일 고혈압·심장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떴고 지병학도 77년 2월18일 병으로 죽었다. 사상검토와 자기비판에서 견딘 이용무와 장정환은 철직돼 자강도 산골로 축출됐다. 김동규와 유장식은 함북 부전골의 특수 교양소에 감금됐다.
그들의 추종자·영향자라는 이유로 군과 사법·검찰계통의 간부 다수가 심한 추궁과 책벌 끝에 농장과 광산으로 쫓겨났다.
전 북한고위관리는 당시 지경수와 지병학이 「심장에 구멍나 죽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고 밝힌다. 실제로 사상검토는 「뼈를 깎고 심장을 녹여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통스런 것이어서 질환 있는 사람들은 견뎌내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에 앞서 노동신문(76·3·7)이 남일부 총리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사망했다고 보도한 뒤 그의 피살설이 나돌기도 했다. 홍콩의 사우스 모닝 포스트지(76·5·22)는 ▲76년 2월7일 남일이 김일성 집무실(청사4층)에서 그와 다투다가 경호원들에게 발코니로 끌려나와 아래로 떼밀려 추락사했다 ▲3월7일 아침에 청사 출근 도중 달리는 승용차에서 동승자들로부터 밖으로 떼밀려 중상을 입고 사망했다는 설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 북한고위관리는 남일의 죽음은 「사고사」였다고 밝힌다. 안주청년화학공장 건설장에서 자재더미가 무너져 깔려죽었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기술자의 협조로 안주청년화학공장을 건설 중이었는데 공사기일이 늦어지자 남일 부총리가 건설관계자회의를 소집해놓고 현장을 둘러보다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한편 「김동규 사건」처럼 당중앙에서만 김정일 후계체제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전 북한고위관리는 당내에서 김정일의 유일지도 체제를 선뜻 접수하지 않는 경향들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노동당의 모든 사업과 권한이 그에게 집중되는 유일 지도체제가 짜여 가는데 대해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당 간부들이 있었고 적극동조하지 않는 관망 자도 있었다는 것이다.
젊디젊은 김정일이 권력을 자기 손에 집중시켜가자 상당수 간부들이 『당 조직 사상 비서가 되자마자 모든 일을 자기가 관할하겠다니 참 당치도 않다』는 반응들이 나타났다는 얘기다. 지역적으론 함경도 쪽에서 이런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이 분위기가 쉽게 가라앉지 않자 도당·군당에 「집단 교양소」까지 만들 정도였다.
함경도 등 도당에서 김정일이 내건 구호(생산도 생활도 학습도 항일유격대식으로!)나 방침(2일당생활총화제도 등)을 제대로 접수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 특히 예술분야에서 시작해 전당에 확대한 2일당생활총화제도에 대해 지방 당 간부들은 『예술인들이야 시간 많아 그게 가능할지 몰라도 당 사업에 바쁜 우리가 어떻게 이틀에 한번씩 당 생활총화를 할 수 있겠는가. 업무는 하지 말라는 얘기인가』라며 반발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당원이라면 이틀에 한번씩 자신의 당 조직생활·사상생활을 결산하면서 자기비판 하는 것이다.
군 장교들은 『김정일이 군내에도 유일 지도체계를 세워 사람·물자이동 때 자기결재를 받으라는 건 너무한 게 아닌가』라고 비판하기 일쑤였고 은연중에 비협조적인 군 간부들이 많았다고 한다. <통일부=김국후 차장·유영구기자·오영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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