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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토론, 옐로 카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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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10면

“혹시 자제분 있으세요?” “없습니다.”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7월 12일 EBS ‘토론카페’에서의 이 한마디로 가수 이안은 상상도 못 할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막말’꾼으로 몰린 그는 토론의 게임에서 인신공격이라는 반칙을 쓴 셈이다. 하지만 실수하는 몇 초를 뚝 떼어 놓은 영상만 보고 그에게 집중포화를 날리기에는 이날 토론은 전체적으로 문제가 많아 보였다. 21일 한나라당 경선 후보들의 토론회에서는 “걸프전 당시 이라크에 있는 현대 직원들에게 귀국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는 박근혜 후보의 질문에 대해 이명박 후보가 “당시 내가 직접 현지에 가서 직원들을 귀국시켰다”고 대답했지만 거짓이었다. 추후 “걸프전을 1981년으로 착각했다”는 변명이 나왔지만 그건 토론의 명백한 반칙이었다.
 
논리와 규칙이 사라진 TV토론
토론에 눈길이 모이는 때다. 방송사마다 간판 토론 프로그램을 하나씩 키운다. 케이블 TV에서도 신해철의 ‘100초 토론’처럼 자유분방한 방식의 토론 쇼를 선보여 토론도 ‘재미’가 있음을 증명한다.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TV토론은 더 사람들의 흥미를 끌 것이다. 그런데도 TV 속의 토론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우선 기본적인 룰을 지켜야 할 토론에서 자꾸 반칙하는 토론자들이 있다면 그 토론은 공정한 게임이 되기 힘들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토론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을 나열한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위를 최대한 활용한다’ ‘말싸움을 걸어 무리한 주장을 하도록 유도한다’ ‘틀린 증거를 빌미 삼아 명백한 명제도 반박한다’ ‘질 것 같으면 진지한 태도로 딴소리를 한다’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전제에 유념해야 한다. 그는 “토론의 기술은 진리를 찾는 데는 관심 없다. 이는 검객의 싸움에서 누가 옳으냐를 따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말로 이런 방법들이 눈앞의 승리만을 위해 말로써 상대를 속이려는 간계에 지나지 않음을 경고했다. 즉 진실을 외면하는 말의 기술을 알아차리는 방법으로써 그의 토론술은 유용함이 있는 것이다.

가수 이안이 날렸던 인신공격은 쇼펜하우어가 ‘논쟁의 위기에서 탈출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꼽은 것이며, 이명박 후보의 거짓 대답은 ‘전문지식이 부족한 청중을 이용해’ 강하게 상대방을 반박하는 수단에 해당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안의 피해자가 된 전원책 변호사의 토론 방법 역시 비난을 피하긴 힘들다.

그는 그날 토론에서 “세계적인 철학가·음악가·예술가들처럼 깊은 사고를 보이는 사람들 중에 여성이 있느냐”라는 전제를 들이밀어 쇼펜하우어가 ‘논증이 안 된 내용을 기정사실화해 강하게 상대를 공격한다’는 방법을 그대로 활용했다.

이뿐 아니라 그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토론에서의 상대방 배려, 대화의 독점 자제 같은 것에 대한 주의 없이 일방적으로 토론을 주도하고 다른 토론자에게 호통을 치거나 화를 내면서 토론의 룰을 자꾸 깨트렸다. 인터넷에서 박명수의 별명을 따서 ‘거성’이라고 별명을 붙여준 것처럼 그의 호통과 직설적인 화법은 보기에는 재미있지만 올바른 토론 자세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호통 한 번이면 전천후 토론 스타?
하지만 TV 앞에 불려온 토론자들의 자질만을 탓할 수는 없어 보인다. 누구를 불러내 어떤 토론을 시키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토론을 만드는 방송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원책 변호사는 이날 토론 이전 ‘KBS 심야토론’에서 군 가산점 문제에 대해 “월급 100만원을 줘도 군대 안 갑니다” 같은 발언으로 인터넷에서 갑자기 스타가 됐다. 그러자 하루가 멀다 하고 EBS와 SBS에서 그를 토론 프로에 잇따라 출연시켰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일방적인 전제, 자신과 다른 생각에는 호통과 꾸짖음으로 일괄하는 그가, 믿음 직한 토론자여서라기보다 시청자들의 눈길을 끄는 볼 만한 말싸움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게다가 EBS ‘토론카페’의 주제는 ‘알파걸’로, 이것이 과연 토론의 주제가 될 만한 것인지 의심마저 들게 했다. 물론 ‘알파걸’이란 말이 등장한 배경인, ‘여자가 남자보다 능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를 계기로 남녀의 능력에 대한 시선을 돌아보자’라는 의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토론 프로그램에서 나누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주제였다. 그러다 보니 무리한 주장들만 나오고 결국 인신공격에까지 이르게 되는 그릇된 토론이 된 것이다.

토론이란 것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어느 것이나 말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겠지만, 적절하지 못한 주제 선정과 토론자 선정은 보는 사람의 흥미를 확 떨어뜨릴 뿐 아니라 시간 낭비라는 느낌마저 준다. MBC ‘100분토론’은 6·10항쟁 20주년을 기념해 서울시청 앞에서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부모들을 모시고 지난 20년을 회고해 보면서 오늘의 의미를 되찾자는 거창한 주제로 토론을 했다. 하지만 그날 나온 패널들은 역사학자 한 명 없이 현직 국회의원이 대부분이었다. 역사적 사건의 의미와 그것의 시대적인 의미를 찬찬히 되돌아본다는 의미는 탈색되고 토론장은 약간의 옛 기억들을 떠올린 뒤 곧장 눈앞의 정치적 이슈로 자꾸 옮아갔다. 완전히 빗나간 토론이었다.

결국 사람들의 반응만 고려해 화제가 될 만한 토론자를 선정하고, 눈길을 끌 만한 주제에 집착해 제대로 된 토론거리를 만들지 못하는 방송에 책임이 있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토론을 해내는 사람과, 그럴듯한 말로 보는 사람을 현혹시키는 재담가를 구분해 내는 시청자들의 똑똑한 토론 관전법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토론으로 대통령까지 골라야 하는 때이니 말이다.

그릇된 전제, 궤변, 거짓말, 말꼬리 잡기, 억지 쓰기 등 토론의 기본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명백히 옐로카드나 레드카드를 날릴 수 있는 똑똑한 시선을 가지고 TV토론을 지켜봐야 할 때다. 

‘현명한 유권자’를 위한 TV토론 시청 매뉴얼

똑똑한 유권자가 제대로 된 대통령을 뽑는다. 하반기에는 대선을 향한 TV토론이 줄을 잇는다. 화려한 말발과 이미지에 가려 정작 토론에서 얻어야 할 후보들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면 토론은 헛된 말잔치일 뿐이다. 조금만 관심 있게 지켜본다면 정치평론가가 아니더라도 토론으로 후보들을 평가할 수 있다. 다음은 ‘현명한 유권자(Smart Voter)’ 운동을 하는 미국 여성유권자협회(The League of Women Voters)에서 내놓고, ABC-TV 등 미국 언론이 보도한 ‘TV토론 관전법’이다. 

-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는가, 회피하는가? : 동문서답하는 답변은 안 된다.
- 주요 이슈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는가, 아니면 감정적인 호소를 하는가?
무조건 자신이 전문가라고 하거나 근거 없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 답변의 근거로 구체적인 숫자와 사실을 제시하는가? : 팩트(fact) 없는 답변은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하지만 때로 듣는 사람을 헛갈리게 하기 위해 숫자를 들이미는 때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 상대의 정치적인 의견을 공격하는가, 아니면 인신공격을 하고 있나?
- 이전에 내놓은 주장과 일관성이 있는 내용을 말하고 있나?
- 현실성이 있는 공약을 말하고 있나?
- 토론자의 자세가 긴장되어 있지 않고, 확신에 차 있으며, 진지한가?

이런 기준을 알고 있어도 뭉뚱그려 토론을 듣다 보면 옥석을 가려내기 힘들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TV토론에 임하겠다면 종이와 필기도구를 준비해 표를 두 개 만든다. 첫 번째 표에는 자신이 관심 있는 이슈를 목록으로 만들어 한쪽에 적어놓고 반대쪽에는 후보들의 이름을 적는다. 그 다음 부분의 토론을 보면서 ‘이해됐음’ 혹은 ‘대답을 회피했음’을 체크해 나간다. 토론이 끝난 뒤 이슈별로 자신의 생각과 가장 가까운 의견을 발표한 후보에게 동그라미를 친다. 다른 하나의 표에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대통령으로 적합한 리더십의 자질 목록을 나열한다. 예를 들어 강직함,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 혹은 커뮤니케이션에 능한 사람, 정직함, 현명함 등으로. 토론 도중 후보들을 이 기준으로 하나씩 체크해 나간다. 토론이 끝난 뒤 후보들이 토론의 내용으로 자신을 감동시켰는지, 아니면 이미지로 감동시켰는지 다시 한번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리더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골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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