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20>이길 수 없는 시련은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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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15면

175㎝, 72㎏의 평범한 체격.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보인다. 1993년 작은 체격의 브렛 버틀러(은퇴)를 처음 보았을 때, “저 체격으로 어떻게 메이저리그라는 거친 세상을 헤쳐가느냐”라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놀라움은 그때가 시작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한 뼘이나 큰 선수들을 리드하고, 피부색이 다른 중남미 선수들에게도 존경을 받으며 구단 직원은 물론 일반 팬들에게도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가 우리를 진정 놀라게 한 것은 1995년. 서른 여덟의 그에게 후두암 진단이 내려졌을 때다. 모두가 그의 은퇴를 당연시했고 회복을 걱정했지만, 그는 1년여의 투병 끝에 암을 이겨내고 그라운드에 다시 섰다. 그날 클럽하우스의 동료들은 그를 따뜻한 포옹과 박수로 맞았다. 그 박수는 그가 현역시절 꺾었던 어느 상대보다 강했던 적(敵), 암을 물리치고 돌아온 데 대한 ‘존경’이었다. 그는 그해 105경기에서 97개의 안타를 더 때린 뒤 은퇴했다.

버틀러의 얘기를 꺼낸 것은 지난 24일 존 레스터(보스턴 레드삭스)가 ‘하루에 거둔 2승’을 말하기 위해서다. 왼손투수 레스터는 그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1승을 올렸고, 자신의 인생을 어둠 속에 빠뜨렸던 암을 상대로 1승을 보탰다. 그래서 2승을 한꺼번에 거뒀다. 그는 지난해 메이저리그에 처음 올라와 7승을 거둔 유망주다. 앞날이 창창하던 그가 암 선고를 받은 건 지난해 8월, 가벼운 교통사고 이후 후유증이 의심돼 정밀진단을 받았고, 그때 암이 발견됐다. 청천벽력이었다.

레스터는 이후 처절한 투병을 시작했다. 여섯 차례에 걸친 항암치료가 이어졌다. 그는 이겨낼 수 있다는 강한 의지로 그 과정을 견뎌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암으로부터 자유로우며 공을 던져도 좋다”는 판정을 받아냈다. 그때 레스터는 서두르지 않았고 완벽한 복귀를 위해 한 계단씩 밟아 올랐다. 그는 싱글A팀 그린빌에서 시즌을 시작했고 트리플A 포투켓에서 14번이나 선발로 등판했다. 그는 그렇게 충실히 준비를 마치고 컴백 마운드에 올랐다. 그게 24일 클리블랜드전이었다.

레스터에게는 원정경기였지만 그는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클리블랜드 팬들도 그의 암 극복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 인디언스 팬들은 1회 말 마운드에 오르는 그를 기립박수로 맞았다. 경기가 끝난 뒤 그는 “(암과 싸우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날이 언제가 될 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게 오늘이라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버틀러와 레스터의 인간승리. 강한 의지는 암도 이겨낸다. 그들이 맞이했던 시련은 한때 그들을 절망으로 몰아갔지만, 그들이 극복의 의지를 굽히지 않자 결국 그들을 강하게 했을 뿐이었다.

레스터가 암을 이겨낸 승리를 거둔 그날 저녁, 이승엽이 두 개의 홈런을 때렸다. 그 홈런도 왼손엄지 부상과 2군 강등이라는 극심한 정신적 부담을 이겨내고 때린 의지의 홈런이었다. 시련은 이승엽을 강하게 했고 그는 그 시련을 이겨냈기에 한 계단 더 올라섰다.

한국인 인질 피랍 이후 시련과 절망의 시간이 계속된다. 버틀러와 레스터, 이승엽의 의지로 버틴다. 우리에게 이길 수 없는 시련은 없다고.

이태일 네이버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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