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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후계자 부상(8)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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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노동당의 조직사상 비서와 정치위원이 된 김정일은 75년중반부터 북한 정권기관, 즉 정무원의 각부·위원회, 도 행정경제기관들을 장악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군쩍에 이은 조치였다.
전 북한고위관리에 따르면 그전에는 그가 정무원업무에 개입하진 않았다고 한다. 정무원측에서 자발적으로 보고해오면 보고 받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75년 중반부터▲집중지도검열▲해당조직기구개편▲강습조직 등으로 정권기관을 직접 관장하기 시작했다.

<빨찌산 2세도 후원>
정권기관에서「유일지도체제」확립이 마무리되자 끝으로 대남부문에 손댔다. 그는 76년 2∼5월에 대남사업에서도 유일지도체제를 세웠다고 한다. 대남부문에서도 그의「정표」(사인)나 친필지시가 효력을 발휘하게 됐다는 얘기다.
76년 중반에 이르면 김정일이 각 부문에서의 유일지도체제 확립에 따라 모든 통치체계에 손을 뻗게 됐다는게 전 북한고위관리의 증언이다.
이 관리는 『김일성에게 제출된 보고서가 김정일을 경유하고 김일성은 김정일이 선별한 보고서만 읽는 식으로 바뀌었다』고 밝힌다. 김일성의 군림아래 김정일이 실제 통치권자로 부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정일이 실제 통치권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북한을 움직이는 실세인「핵심」 대열을 확고히 장악한데 있다. 전 북한고위관리는『북한에서는 영도핵심-지도핵심-집행단위핵심-기초단위핵심-당원핵심-맹원핵심 등이 사슬로 얽혀 통치체계를 이룬다』면서 이들 핵심이 전당·전군·전국가를 움직이며 김정일이 이들 핵심을 걸머쥐고 있는 형국이라고 설명한다.
「핵심」장악에서 중요한 것은 인사권인데 77년 무렵에는 당·국가·군대의 최고위직 인사권이 그에게 집중됐다고 한다.
이에 따라 남은 정치일정은 김정일의 표면적 등장뿐이었다.

<"대물림" 내외 천명>
그가 외부세계에 얼굴을 비친 것은 80년10월10일 평양에서 개막된 노동당 6차대회때다. 그는 이날 주석단 맨앞줄 왼쪽끝에 자리를 잡았으며 대회집행부 명단상으론 김일성·김일·이종옥·오진자에 이어 다섯번째였다. 그리고 14일에 김정일은 정치국 상무위원·비서·군사위원으로 선출됐다. 서열4위 (김일성·김 일·오진우 다음)였으며 김일성을 제외하고는 정치국·비서국·군사위원회의 모든 지위에 임명된 유일한 케이스였다.
준비에서 진행에 이르기까지 김정일의 책임아래 진행된 6차 당대회는 김정일이 후졔자임을 내외에 천명하는 행사였다고 한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자리잡는데는 혼자 힘만으론 어려웠다. 주변에 포진한 강력한 후원자들을 등에 업었다는 얘기다. 후원자는 대략 세 부류였다. 빨찌산 원로와 빨찌산 출신 소장층, 그리고 빨찌산 2세들이다.
전 북한고위관리는 739월∼75년2월간 김정일 부상에 역할을 한 빨찌산 원로로 김일(총리· 사망), 최용건(부주석·사망), 최현(인민무력부장·사망), 박성철(부총리·현부주석), 오백룡(노농적위대사령관·사망), 김동규(정치위원·불명), 서철(당검열위원장·사망), 임음추(정치위원·사망 ), 오진우(인민군 총참모장·현정치국상무위원·인민무력부장) 등을 꼽는다. 김동규는 처음엔 김정일 부상을 도왔으나 70년대 중반에는 후계체제를 반대해 실각한 특이한 인물이다.
빨찌산 소장층도 원로들을 부추겨 김정일후계를 도왔다고 한다. 소장층은 김일성·김정숙의 「전령병」출신으로 김정숙과 가까웠던 이들이다. 자연히 김정일과 친화력이 있었다.
이들은 당내 분위기를 원로들에게 전해 후계작업을 빨리 완료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소장층에는 전문섭(호위사령관·현국가검열위원장 ), 백학림(사회안전부 부부장·현사회안전부장·차수), 이을설 (부총참모장·현호위총국장·차수), 이두익(제1군사령관·현당군사위원·차수), 주도 일 (집단군사령관·현평양방어사령관·차수), 조명록(현공군사렁관·대장)등이 있었고 전문섭과 백학림이 가장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군수뇌부 인사 관리>
김정일후계에 협조한 빨찌산2세로는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를 비롯해 서윤석·김국태·이찬선·이창선·이태복·전금선·전병호·최영림·한성룡 등을 꼽을 수 있다고 한다.
당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서윤석(현정치국위원·평남도 당 책임비서)은 역사연구소나 선전선동부가 담당하던 『덕성실기』(김정일관련) 편집위원회를 조직지도부내에 두고 출판을 맡았다 (현농근맹위원장 박수동이 당시 조직지도부장). 선전선동부장 김국태 (현 당비서)와 부부장 김기남 (현 당비서)은 신문을 통한 김정일부각에 나섰다.
문화예술부문에서 김정일을 부상시키는 작업은 당시 문화예술부장이던 이창선의 몫이었다. 대학이나 청년학생들 사이에서 김정일을 부각시키는 작업은 정무원 고등교육부장 최태복(현정치국후보위원·비서)과 보통교육부장 전금선 (오진우의 부인)이 맡았다.
이렇게 볼 때 현재 북한권력의 핵심인사들 대부분이 김정일 후계체제 공고화에 앞장서온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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