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인터넷 10년] 1. '변종 언어' 홍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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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이 세상을 바꾼다-'.

요즘은 '디지털'이라는 말을 빼고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다. 폐인.매트릭스.메신저 등은 현대인의 의식과 생활을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용어다. 국내에서 인터넷이 상용화된 지 10년을 맞아 '인터넷 중앙일보(www.joongang.co.kr)'와 함께 최신 유행하는 디지털 키워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변화상을 시리즈로 짚어본다. [편집자]

회사원 박재형(37.서울 마포구 망원동)씨는 최근 초등학생인 아들이 컴퓨터 게임 도중 이상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격했다. 상대방이 'KIN'이라고 쓰자 아들은 '나도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朴씨는 KIN이 '당신과는 이야기하기 싫다' '관심 없다. 짜증난다'는 욕설에 가까운 뜻이라는 아들의 설명을 듣고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KIN을 시계 방향으로 90도 돌려보면 한글 '즐'과 비슷한 모양이 된다. 성인들이 '즐팅(즐거운 채팅)'등 가벼운 인사말로 '즐'을 사용했던 것과 달리 KIN은 '나와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배타적인 온라인 문화를 나타내는 키워드로 변질됐다. 학교.교사.친구 등 종래 청소년들의 정체성을 형성해 주던 통로가 약해지면서 기성세대를 거부하는 정서가 온라인의 양방향성과 겹쳐 이 같은 '변종 언어'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원래 KIN은 1990년대 하이텔.천리안 등 PC통신에서 글 꼬리에 '즐거운 통신되세요'라고 붙인 데서 나왔다. 인사말이었던 '즐'이 경멸적인 의미로 변한 것은 온라인 게임 탓이 크다. 게임 아이템 등을 교환할 때 조건이 맞지 않으면 보통 '즐겜(즐거운 게임되세요)'하고 헤어졌다. 이 과정에서 터무니 없는 거래 조건을 제시하면 '즐~'하고 떠나는 것이 반복되면서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고 변한 것이다. 나아가 인터넷 게시판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른 글을 보면 댓글에 '즐~'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특히 '초딩은 즐(초등학생 수준과는 대화하기 싫다)' 등 과격한 내용이 등장하면서 일부 사이트에서는 '즐'을 삭제하기 시작하자 'KIN'으로 진화한 것이다.

오디오.디지털카메라 동호회 등에서도 자신과 다른 의견에는 여지없이 KIN이 붙는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의 적'이며 '대화나 타협의 여지는 없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KIN으로 상징되는 배타적인 행위가 일어나는 것은 자신과 동일한 관심사나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과 심리적인 유대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연세대 황상민(심리학과) 교수는 "사이버 공간에서는 '동일한 관심사'가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배타적 성향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게 마련"이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실 공간에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다양한 이웃과 경험을 나누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창우.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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