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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2. 유년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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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경의선 시험운행 열차가 5월 17일 도라산역에서 개성으로 가고 있다. [중앙포토]

 내가 잘 나가던 UCLA 교수 시절부터 이야기를 풀어 가니까 마치 어릴 적부터 열심히 공부했던 모범생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내 또래가 대부분 그렇듯 일제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공부다운 공부를 언제 해 봤겠나.

 나는 1936년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에서 아버지 조병순과 어머니 유강애 사이에서 태어났다. 4남매 중 둘째다. 만석꾼은 아니더라도 천석꾼은 되는 부잣집의 아들이었다. 당시 일제의 수탈 행위는 갈수록 극성스러워졌다. 일본이 제국주의 말기 증상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그래도 나는 보릿고개를 모르고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할아버지·할머니 뿐 아니라 증조 할아버지·할머니도 함께 살고 있었다. 그분들은 나를 포함한 손자들을 끔찍이 귀여워했다.

 나는 세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다. 아버지는 중동중학교를 중퇴하고 제약사업에 뛰어드신 분이었다. 활명수를 만들었던 경성제약을 경영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에는 몇명의 독일인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들이 준 과자·초콜릿의 맛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아버지는 나중에 일본에서 제약 관련 공부를 하고 온 친척 할아버지에게 공장을 넘겼다.

 서울 재동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내려진 일제 당국의 소개령에 따라 고향으로 다시 가야만 했다. 아버지는 나를 고향에 데려다 주고 다시 서울로 가셨다. 1년 뒤 광복을 맞았다. 그때 어린 내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38선이 무엇인지, 김일성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광복 후 38선이 그어지면서 고향에 있는 학교에서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를 가르쳤다. 나는 거기서 김일성 사진을 처음 봤다. “김일성 장군…”하는 노래를 들었던 터라 그가 아주 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젊은 모습이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1945년 10월이었을까. 날씨가 제법 쌀쌀한 날이었다. 사랑방에서 할아버지가 장죽을 태우시며 “38선이 굳어지는 것 같은데 장희를 애비가 있는 서울로 돌려보내야겠다”며 할머니와 의논했다. 며칠 뒤 처음 보는 어느 아저씨가 나를 데리고 캄캄한 밤에 38선을 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 주변에 뭔가 심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성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껴안아 들어 올리며 볼을 비벼댔다. 그렇게 아버지의 품이 포근했던 적이 있었을까 싶었다. 개성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다시 왔다.

 내 고향은 조씨 집성촌이었는데 지금도 그곳에 많은 친척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경의선 철길이 다시 이어져 남북한 간 왕래가 자유로워지면 고향에 한 번 가보고 싶다. 마을 저수지며,우리 집 등 고향 산천이 아직도 자주 내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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