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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꿈꾼적은 없지만 애국심갖고 하니 되더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두허수석의 퇴진과 함께 좌천된 두드러진 사람이 사정수석실의 박간제비서관이 었다. 정통재무관료 출신인 그는 허삼수사정수석에게 김재익경제수석이 밀어붙인 실명제의 문제점을 이론적으로 공급하는일을 맡았었다.
그는 이미 국보위 재무분과 위원시절 실명제가 처음 논의됐을때 우리 경제의 실상을 들어 시기상조라고 반대했고 국보위에, 참여한 김종인서강대교수등 동조세력을 규합했다. 박비서관은 전대통령과 같은 합천출신이었고 국보위 시절 가장 열심히 일을 해 두 허수석편에서 실명제를 반대하지 않았으면 꽤 출세할수 있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괘씸죄에 걸려 조달청 차장으로 밀려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달청 차장은 퇴임대기자리 비슷하게 여겨졌었다.

<“외무장관직 넘겨라”>
두 허수석의 경질에 이어 박판제비서관까지 형편없이 좌전되자 청와대비서관들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전대통령은 노신영안기부장을 임명하는 과정에서도 충성심을 강조했다.
노신영씨의 회고.
『5월30일 청와대에서 부르길래 외무장관으로서 당시 현안인 대일차관문제를 보고하라 는줄 알았지요. 잔뜩 보고 준비를 해갔는데 한참 듣고 있더니 전대통령이 갑자기 정치문제를 다룬 경험이 있느냐고 묻더라구요. 없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오랜 외교관으로서 주재국 정세분석같은 것은 하지않았느냐고 하더군요.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문제등 정세를 분석해 일일보고는 해왔다고 했지요. 청와대를 나오면서 대통령과의 대화치고는 싱거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튿날 다시 들어오라는 거예요. 무슨 일인가 싶어 갔더니 외무장관직을 이범석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넘기라는 거예요.「아, 이 일 때문에 어제 그런말을 했나보구나」짐작했지요. 다소 섭섭한 감정도 들어 그해 8월 아프리카순방때 각하를모시고 난뒤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했지요. 전대통령은 계속 그 일은 이실장에게 맡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언제 내가 당신보고 그만두라고 했느냐면서 안기부장을 맡으라는 거예요. 기가 막히더군요. 나도 모르게 웃었습니다. 전대통령이 왜 웃느냐고 하길래 「가당치도 않으신 말씀」이라고 간곡히 사양했지요. 저녁에 허화평수석을 만나 의논했지요. 허수석이 안기부장을「맡으시라고하고 노태우내무장관도 이미 알고 있었다며「하시라」고 하더군요. 다음날 청와대에 올라가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지요. 그러자 전대통령이 정색을 하더군요. 충성심이 없으니 그런 말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나도 육군대장까지는 될줄 알았지만 대통령을 맡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적이 없다. 그렇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하니 되더라」며 안기부장을 왜 못하느냐고 하더군요.』
전대통렁은 그가 외무장관으로서 탁월한 업무처리와 상황파악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상당히 생각해 안기부장에 임명한 것이 틀림없다.
국세청장을 행정관료츨신 김수학씨에서 신군부출신의 안무혁정화위원장에게 남긴 것은 전대통령이 국가경영에 조세행정의 중요성을 파악했다는 징표였다. 이는 전대통령의 경제공부가 점점 본궤도에 진입한것과도 일치한다.

<발령내고 양해구해>
안위원장을 국세청장에 추전한 사람은 허화평수석이었던것으로 알려졌다. 발탁과정에대한 안씨의 증언.
『저는 순전히 방소송을 통해 인사발표를 듣고 알았습니다. 발표 이틀후인 5월23일 일요일 청와대에서 불러 차도없어 택시를 타고 들어갔지요. 이미 전대통령은 국세청기능에 대해소상히 파악하고 계시더군요. 내가「인사 귀띔도 안해주셔서 당황했습니다」고 하자 전대통령은「미리 귀띔해 주어 못하겠다고 하면 나도 마음이 약해져 취소할수 있지 않은가. 이해해달라」고 하더군요. 국세청업무가 생소한 것이지만 자네는 해낼것이며 충성심을갖고 하면 못할것 없다고 하더군요.』
전대통령은 자신의 판단으로 적재적소의 인물을 고르면 미리 발령을 내고 나중에 이해를구하는 인사스타일을 곧잘 구사했다.
전대통령이 내건 충성심이란 잣대에 노태우장관은 항상 몸을 낮추는 것으로 화답했다.
노장관은 5정초창기부터 전대통령으로 부터 일정한 견제와 지원이란 2중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전대통령은 보안사령관을 노장군에게 인계하고도 직접 관리했다. 그는 작년6월 아세안5국 순방에 나설때 정도영보안처장을 불러「군이 잘 하고있느냐」고 확인했다. 노사령관은 전대통령이 정도영처장을 직접 청와대로 호출하는 것을 못마당하게 생각했지만 제대로 내색도 못했다. 정참모장은 보안사에서 보안처장·참모장을지내 전대통령으로선 믿음직한 부하였다.일선 보안부대장시절 강직함으로 소문났고 12·12사태때 정승화총장지지쪽의 움직임을 파악, 군출동을 막는 공로를 세운바 있다.
그때 한창 문제가 되기 시작했던 전경환의 새마을 문제에대해서도 노장관은 주무장관이었음에도 한발 불러서 있었다. 이때문에 군후배 일부는 노장관의 처세에 대해「골치아픈 일은 후배들이 알아서 해주길 바라고 자기는 흙탕물을 안묻히겠다」는 것이라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노장관의 마음속에는 이미「87년 전두환 이후」를 겨냥하는 구상이 자리 잡혀 있는듯했다.
전대통령으로부터 추방당한두 허수석은 「좌절한 개혁주의자」라는 평판을 위안으로 삼아 미국 외국유학길을 떠났다. 83년1월 허화평전수석은 미국헤리티지재단연구원으로 떠나고 두달후 허삼수수석은 하와이 동서문화센터로 간다.
전대통령은 이후 외국순방중 이들을 만나 위로해주고 85년12대총선때 출마를 권유하기도했으나 권부에서 떠난 인물의 재기용은 여러가지 장애에 부닥치게 마련이었다.
84년말 전대통령은 허삼수전수석에게 국세청장을 맡으라고 했으나 그는 고사했다. 민간인허삼수씨는 동지인 허화평의 동시복귀를 요구했고 이것이 여의치 않자 포기했다. 허화평씨를 출마시키려는 전대통렁의 구상은 권부내부의 반대로 사라지기도 했다. 두 허수석의 정치재기는 92년 4·26총선에서 순전히 독력으로 당선되면서 가능했다. 정치좌절과 역경극복엔 오랜 기간이 걸린것이다.

<박몰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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