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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내가 연다] 3. 음악 테너 배재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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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세계 각지의 극장에서 열리고 있는 오페라 공연을 훤히 꿰고 있는 포털 사이트 오페라베이스(www.operabase.com) 검색창에 '리골레토''만토바 공작'을 입력하면 44명의 테너 가수 명단이 뜬다. 최근 1~2년 사이에 세계 유수의 극장에서 만토바 공작 역으로 출연했거나 출연할 예정인 성악가들이다.

올 초부터 독일 자르부뤼켄 국립오페라 주역 가수로 전속 계약을 하고 '일트로바토레''루치아''라보엠''돈 카를로' 등 네 편의 오페라에 출연하는 테너 배재철(裵宰徹.35)씨도 그 중 한 명이다.

2001~2003년 핀란드 사본린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상연된 '리골레토'에서 만토바 공작 역을 3년 연속 맡았기 때문이다. 사본린나 페스티벌은 호수로 둘러싸인 고성(古城) 야외무대에서 매년 여름 한 달간 열리는 오페라 축제다.

"전속 계약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한 극장에 묶여 마음에 들지 않는 배역까지 맡기 싫어 네 개의 작품에 25회 출연하는 '배역 계약'을 했어요. 유럽 극장에선 작품 제작에 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어 긴장감을 늦출 수는 없지만 무대나 음악 면에서 배울 점이 많아요."

지난해 12월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원형무대 오페라 '라보엠'에서 로돌포 역을 맡은 배씨는 세계 정상급 성악가들과 어깨를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음을 입증해 보였다.

지난해 4월에는 뉴서울오페라단이 제작한 '라보엠'에도 출연한 바 있다. 지난 5월 영국 카디프의 웨일스 국립오페라에서도 같은 역으로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당시 영국 더 타임스는 "단 한번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서정적인 목소리, 정말 미미를 사랑하는 남자"라고 썼다.

배씨는 한양대와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하고 바르셀로나 비냐스 콩쿠르에서 최고 테너상을 수상했다. 빌바오 콩쿠르 1위 (1998년), 아라갈 콩쿠르 1위(99년) 등 각종 콩쿠르를 휩쓸면서 유럽 무대에서 떠오르고 있는 테너다.

그는 "유럽에서는 오페라 극장이 직접 오페라를 제작하는 데 반해 국내에서는 오페라단이 오페라극장을 대관해 공연한다"며 "건물은 있는데 '극장'은 없는 격"이라고 국내 오페라 제작 환경에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에 주로 출연하고 있지만 가령 구노의 '파우스트' 같은 프랑스 레퍼토리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10년 후쯤이면 '아이다'등 드라마틱한 배역에도 출연하겠죠."

배씨는 오는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서울시향 신년음악회에 출연, '리골레토' 중 '여자의 마음', 한국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부른다. 또 오는 2월 14일 일본 도쿄 산토리홀에서 열리는 밸런타인데이 콘서트에 초청을 받았다. 일본을 대표하는 여자 영화배우 3명도 함께 출연하는 테마 콘서트다.

배씨의 일본 무대 진출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9월 도쿄 분카무라(文化村) 오차드홀에서 열린 베르디의 '일트로바토레'에서 주역으로 출연한 것.

그는 청중.연주자.작곡가 등이 한데 어울려 훌륭한 무대를 만들어내는 사본린나 오페라 축제에 출연하면서 핀란드의 오페라 열기가 부러웠다고 말한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유럽 무대에 진출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고국 무대에 서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오페라 문화를 꽃피우려면 인프라 구축이 선결과제입니다. 한국 성악의 수준도 세계적이고 한국 출신 성악가도 많지만 1년에 한두 편 제작하는 오페라단 몇개가 있는 게 고작입니다. 문화 선진국에서처럼 국가가 오페라 지원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배씨는 지난해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이주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좀처럼 외국인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에 차별이 덜한 독일로 옮긴 것이다.

이탈리아.독일은 물론 동구권 출신 성악가들과 경쟁해 유럽 무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실력을 키우는 일밖에 없다는 게 후배 성악가들에게 그가 들려주는 조언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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