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3부] 가을 (10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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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이럴 때는 우리 막내 제제가 늘 쓰는 표현이 딱 알맞다. 입을 삐죽 내밀고 “내가 미춰”해야 하는 것이다. 솔직히 이런 말을 엄마가 들으면 펄펄 뛰기야 하겠지만 이럴 때는 엄마에 대해 짜증이 많이 났던 아빠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한 가지를 생각하면 거기에 골몰해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우리 엄마. 그게 지금은 나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고 해도, 그게 지금은 짜증스러웠던 것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냉정하지만 늘 옳은 게 무엇인가 사리 분별부터 하고 보는 아빠나 새엄마 편이 수월할 것이다. 대체, 금방 전화를 한다고 했는데 내가 전화를 할 때까지 좀 기다리기나 하지,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슨 호랑이나 악어의 소굴로 탐험을 떠난 것도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새엄마는 엄마의 전화라는 것을 눈치챈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전을 하는 새엄마의 얼굴로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우선 엄마를 진정시켜야 했다.

“엄마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아직 울지 마. 응? 자아. 내가 천천히 말해줄 테니까 사실을 정확히 알고 울든지 하라구. 자 마음을 진정시키고 잘 들어. 나는, 아빠네 집으로 갔다가, 지금은 새엄마가 데려다 주어서 그 차를 타고 할머니네로 가고 있어.”

“뭐어? 새엄마 차를 타고?”

“그래…. 그렇다구. 아빠네 집에서 아빠랑 새엄마랑, 잘….”
 
잘, 이야기를 끝냈다고 말하려다가 나는 잠깐 멈추었다. 아니다. 잘 끝낸 것은 아니었다. 상황은 이상스레 변해버렸으니까.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하자 잘 끝낸 것이 맞는 것도 같았다. 머리끝까지 사무쳐 오던 미움은 물속으로 잠기는 드라이아이스처럼 형체를 잃어버린 건 사실이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그것은 평생을 두고 우리가 풀어갈 숙제 같은 매듭인지도 모른다.

“잘 이야기하고 이제 할머니네로 가는 거야. 거기서 자고 내일 집으로 갈게. 엄마는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제발.”
 
엄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진짜야? 정말이야? 꿩?” 하고 묻더니 금세 웃음 띤 목소리로 다시 황당한 말을 했다.

“알았어. 잘했다. 그런데 네 새엄마도 갑자기 하느님 믿고 구원받았다니? 어떻게 그렇게 빨리 변할 수가 있데? 아아…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나 봐.”
 
어른이 되어도 엄마는 내 막내 동생 같고, 아빠는 여전히 반장 역할만 하는 세모돌이 같고, 새엄마는 무서운 에어로빅 강사 같다. 왜 내 주위의 어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모자란 사람들일까, 내가 만난 선생님들도 그렇다. 우리들한테는 공부도 잘하고 약속도 잘 지키고 공손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하면서 자기네들은 실은 뭐 그렇게 좋은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약속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리고 거만한 데다가 더구나 결정적으로는, 예쁘거나 잘생기거나 착하지도 않다.

그런데 혹시, 그러니까 어른이 되어도, 몸도 마음도 커다랗게 변하긴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결점을 가지고 그것을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 거라면, 내가 어른들한테 했던 기대가 실은 완벽에 대한 요구였다면… 그렇다면 혹시, 나도 조금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어른 저 어른 흉보고 자라다가 막상 자기가 어른이 되면 그러니까…, 외로워지는 걸까? 이제는 흉보고 탓할 사람도 없어져서?
 
나는 비로소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새엄마를 조금은 다른 눈으로 쳐다볼 수 있었다. 엄마 말대로 섣불리, 쉽게, 모두 다 용서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다른 일이라고 해도, 이제는 그저 어쩌면 동등한 한 결점투성이 인간을 바라보는 그런 여유 같은 것이 내 안에서 처음으로 싹트고 있었다. 그러자 나는 내가 비로소 어른이 되기 10미터 전에 와 있는 것을 깨달았고 그토록 바라던 어른이 되는 것이 싫고 실은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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