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2007대선릴레이칼럼①

누가 시대정신을 대표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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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번 대선은 과거와 비교할 때 여러 모로 특이한 것 같다. 5년 전을 돌이켜 보면 이미 3월께 소위 노풍(盧風)이 거세게 불었고 노무현 후보의 부상을 둘러싼 격렬한 호오(好惡)의 감정이 세대 간 대립을 격화시켰다. 그 이전 대선에서는 후보자에 대한 지역별 선호에 따라 지역주의 광풍이 불곤 했다. 그러나 올해에는 대선이 불과 5개월밖에 남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바람’도 불지 않고 유권자를 갈라놓는 뚜렷한 전선(戰線)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번 대선을 바라보는 유권자들의 태도는 이처럼 대체로 차분하고 담담하다.

 이렇게 된 까닭은 여권에서 아직까지도 변변한 후보자를 내세우지 못해 여야를 대표하는 후보자 간 진검승부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지난 20년간 이뤄진 정치적 변화의 결과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2002년까지 대통령 선거 때 제기됐던 핵심적 의제들은 모두 과거 시대의 문제점을 교정하자는 것이었다. 군정종식, 재벌개혁, 관료개혁, 지역갈등 해소, 대북·대미 관계의 재조정 등 그동안 대선을 뜨겁게 달군 의제는 군·재벌·관료·경상도·반공이데올로기 등 권위주의 정권을 이끌어 온 정치적 기반에 대한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제들이 많은 유권자의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럴 만한 충분한 역사적 이유와 정당성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호남 유권자들이나 386세대처럼 그런 의제가 정치적인 폭발력을 갖도록 점화시킬 수 있는 집단적 힘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난 몇 차례의 대선은 우리 사회가 ‘성난 얼굴로 뒤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대선 때마다 제기돼 온 과거의 부정적 유산에 대한 개혁 작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군은 탈(脫)정치화됐고 호남은 집권했으며 대북·대미 관계도 변화했다. 재벌개혁·관료개혁도 시도됐다. 물론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많고 하루아침에 다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지만, 중요한 점은 적어도 이와 같은 과거 시대의 이슈가 더 이상 유권자들의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할 만큼 이제 정치적으로 상당히 걸러졌다는 사실이다. 호남 유권자나 386세대처럼 응어리진 정치적 한을 해소하지 못한 채 가슴속에 품고 있는 사회적 집단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번 대선에서 범여권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진보 진영의 정당성은 과거 권위주의 세력이 남겨 놓은 부정적 유산에 대한 개혁과 청산 작업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던 유권자들이 이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여권을 포함한 진보 진영의 정치적 효용성은 이전과는 다르게 됐다. 현재 범여권을 포함한 진보 진영의 침체는 유권자에게 어필하는 매력적인 후보를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는 미래지향적인 명분과 정당성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더 큰 관련이 있다.

 이번 대선은 지난 20년간 과거 역사에 대한 수선 작업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지금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던지는 이벤트성 사업이나 거창한 구호가 새로운 시대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번 대선의 역사적 의미는 현실 문제에 대한 대증적 처방이나 단순한 정책 제시를 넘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후보들 간 경쟁만 뜨겁고 대다수 유권자들은 한걸음 떨어져 차분하게 관망하고 있는 것도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을 어느 후보도 제대로 대표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인식 없이 변화의 길목에 서서 망설이는 유권자를 설득해 낼 수는 없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와 가야 할 길에 대한 후보들의 보다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