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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후계자 부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67년부터 당에서 추진해온「유일사상체계」확립이 어느 정도 가닥을 잡자 김정일은 73∼74년간에 「유일지도체계」확립을 동시에 밀고 나간다. 당권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는 치밀한 계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 북한고위관리에 따르면 74년10월 비밀리에 열린 당 제5기9차 전원회의는 유일지도체계 확립문제를 다뤘다.
이 회의에서 김정일은 정치위원겸 조직사상비서 자격으로「비밀보고」를 했다. 그는 보고를 통해▲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원칙」의 전당적 실천▲당내부사업지도서 작성▲당조직·기구의 부서·직능조정등 3대과업을 내놓았다
내부사업지도시는 당단체·정권기관·근로단체에 대한 지도요강이고 부서·직능조정은「과」단위로 직능을 세밀치 항목화한 것이었다. 직능조정에따라 각급단위 책임자의 업무가 명확해지고 느슨한 구석이 없이 꽉 조여지게 됐다고 한다.
3대과업 진두지휘-이같은 당사업체계의 대폭조정은 노동당에서 처음있는 일이었다. 비밀보고 작성에는 당시 김일성고급당학교 제1부교장이던 장성엽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의 형) 을 팀장으로하는 1백여명의 신진엘리트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후계체제를 유지하자면 이를 밑받침하는 체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영락없이 김정일의 통치기반 강화를 위한 조치였다. 「중국·소련의 경험은 후계자처럼」만으론 권력승계가 어렵다는걸 보여줬기 때문에 김일성그룹은 면밀하게 대비해 나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촉발시킨건 물론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74년7월31일 「당사업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당조직 일꾼강습 참가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전당이 당중앙의 유일적 지도밑에 움직이는 강한 조직규율을 세우는 것은 당대열의 통일과 단결을 보장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의 하나』라면서 『당중앙이 내세우는 모든 방침들을 무조건접수하고 철저히 관철』할 것을 촉구했다 ( 『조선중앙연감』75년판 95쪽). 말할 것도 없이 「당중앙」은 김정일을 지칭한 것이다.
지명만으론 곤란-당시 노동당 유일지도체계확립과정을 지켜본 전 북한고위관리는 『진두지휘자는 김정일자신이었다』고 밝힌다. 김정일이 「유일지도체계」확립에 앞장선 장본인이었다는 얘기다.
김정일은 『당·군·정권의 모든 문제를 나에게 집중시키고 나의 결정과 지시에 따라 처리, 집행되고 보고되는 일사불란한 지도체졔와 무조건 복종하는 조직규율을 세워야 한다』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유일지도체졔 확립의 집중적 표현이었다고 한다.
조직·사상·구체적 실무에 이르는 어떤 문제라도 「당중앙」인 자신이 직접 관장하겠다는 뜻이다. 또 당중앙에서 도당·군당을 위시한 말단세포, 정무원등 국가기관의 당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겠다는 뜻이다.
북한측의 공식자료도 이 무렵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전당과 온 사회에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투쟁이 심화되는 과정을 통하여 전당· 전국· 전군이 한몸과 같이 움직이는 수령님의 유일적 영도체계가 더욱 확고히 서게 되었으며 당중앙의 유일적 지도체계가 철저치 확립되었다』(『조선중앙년감』 75년판, 253쪽)는 것. 「당중앙」 은 역시 김정일을 가리킨다.
한편 노동당에서 김정일의 지도권이 확립되던 74년에는 권력각축과 관련,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퇴장이다.
전 북한고위관리는 김정일과 각축을 벌이던 김성애와 측근들이 74년6월의 평양시당 전원회의를 끝으로 권력무대에서 퇴장했다고 증언한다.
김정일이 평양시당과 중앙여맹에 조직지도부및 호위국 검열원을 파견, 조사함으로써 이것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김성애측근의 월권행위를 파악한 뒤 김일성에게 보고해 이들을 내몰았다는 것이다
여맹사업 비리 추적-그 내막은 이렇다.
우선 20여명의 검열원들이 73년말부터 약5개월간 해군사령부 정치위원 김성갑(김성애의 친동생)의 평양시당 시절의 비리를 캤다. 한편 여맹사업을 검열해 김성애와 측근들의 비행을 낱낱이 밝혔다. 그 내용을 보고받은 김일성은 노발대발하여 평양시당 전원회의를 소집했고, 그 자리에서 김성갑과 동생 김성호(황해북도당 비서) 가 심각하게 비판 받았다. 평양시당 전원회의와 곧이어 열린 여맹 전원회의를 통해 김성애측근은 모조리 탄광·농촌으로 쫓겨갔다. 김성애는 여맹위원장 자리는 겨우 유지하게 됐으나 그뒤 일체의 월권이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김정일의 지도권은 확고해졌다. 75년2월에 열린 10차 전원회의는 마지막 남은 절차를 밟아 후계자를 공식확정했다.
당시엔 이 회의 의제가 3대혁명과업 수행을 위한 지도활동상황, 당창건 30주년 당중앙위 구호문제였던 것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전 북한고위관리에 따르면 실은 김정일을 후계자로 「공식확정」하는 자리였다, 원로들의 내부논의가 시작된지 4년만이었다. 김정일은 당에서의 유일지도체계 확립을 발판으로 70년대 중반에 군부권기관(행정· 경제· 교육· 과학부문 포함 대남사업쪽에도 점차 손을 뻗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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