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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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장사건을 놓고 벌인 권력내부의 갈등은 알려지지 않은 많은 지사를 간직하고 있다.
82년5월 사건이 한참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 낸 이학봉민정수석의 사표제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 이수석의 사표소동은 양허( 허화평정무1· 허삼수사정수석 )우위의 청와대 권력서열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친인척 잇따라 퇴진…○
전두환대통렁의 신임이 양허에서 이민정수석 쪽으로 옮겨간 것이다. 5월22일 토요일 오전. 대통령특사로 중남미 4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이범석청와대비서실장은 김포공항에서 심상찮은 보고를 받는다. 바로 전날 이학봉민정수석이 돌연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두 허씨와 이수석의 평소 관계를 알고있던 이실장은 직감적으로 사태가 심각하다고 느낀다. 이실장은 일요일인 24일 오전 이례적으로 수석비서관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그가 밖에 나가있던 3주간 국내에서 벌어진 갖가지 사건을 생각하면 회의를 소집한다고 해서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우선 장영자의 형부이자 전두환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광업진흥공사사장이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고 국민적 관심이 권력배후설에 온통 쏠려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국민여론은 이 사건을 정치권력이 결탁된 것으로 거의 단정하고 있었으며 대통령 친·인척의 개입의혹은 좀체 씻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규광사장의 구속은 일파만파를 불렀다. 5월18일 전대통령의장인인 이규동대한노인회장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불러났다.
이틀후 전대통령의 동서인 김상구평통사무차장( 현민자당의원 )도 면직됐다. 지방출장중이던 김상구차장은 김용휴총무처장관으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연락을 받고 와 『이· 장사건으로 친· 인척들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전경환새마을사무총장도 그만둔다』는 얘기를 듣고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러나 전경환총장의 사임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같은 친·인척들의 잇단 2선후퇴는 두 허수석의 건의와 유학성안기부장의 진언이 주효한면이 있었다. 전대통령도 불꽃처럼 번지는 여론의 역풍을 견딜 수 없어 결국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청와대 비서관 Q씨의 설명
『유부장의 친·인척 2선후퇴 건의는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였지요 . 두 허씨들이 위낙 친·인척묶기에 앞장서기도 했지만 유부장의 진언이 상당한 효력을 발생했다고 봐야죠. 전대통령도 안기부장의 건의는 함부로 묵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사퇴의 회오리는 권정달민정당사무총장 경질등 민정당당직개편과 11개부처장관의 대폭개각으로 일단 마무리지어졌다. 그러나 진짜 큰 후유증은 청와대쪽에서 일어났다.
전대통렁은 장여인의 배후가 청와대라는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져가자 곤훅스럽기 짝이 없었다. 권력개입이 없었다는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TV로 생중계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대검에선 기자들과 일문일답은 하겠지만 생방송은 전례가 없어 곤란하다며 난색을 보였다. 그러나 전대통령은 이수정비서관을 통해『검찰이 텔리비전에 안나가면 내가 직접 나가겠다』 고 권력배후설을 해명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전대통령의 대응과 여론의 확대사이에서 허화평·허삼수수석은 차제에 친·인척문제에 단호한 선을 그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두 허수석은 전대통령이 친·인척문제에 절도를 잃은 것과 관련, 육사 1년후배이자 「혁명동지」 인 이학봉민정수석을 몹시 몰아불였다. 같은 수석이지만 두 허씨의 이씨에 대한 태도는 상하관계나 다름없었다. 두 허씨가 「개혁」그 자체로 농축되어 있었다면 이수석은 성격이나 하는 일에 비교적 융통성이 있고 전대통령에게 고분고분하는 편이었다.
Q씨의 계속된 회고.
『친· 인척관리를 그 따위로 하니 이린 문제가 터졌다며 다그치는 두 허수석의 목소리는 가열찼습니다. 전대통렁에게 누를 끼쳤으니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민정비서실을 몰아세웠죠 . 물론 타깃은 책임자인 이학봉수석이었지요 . 두 許수석은 이학봉수석이 전대통령에게 우불우물하며 친·인척들과 적당히 타협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것 같았어요. 허화평수석은 심지어 친한 언론인에게 내가 이·장사건으로 물러날지도 모르니 괜히 나하고 친한 척 하지 마시오. 나는 이미 있을만큼 있었고 이번 일이 잘못해결되면 물러날 생각이오라고 하더군요. 두 허수석의 공세가 거세지자 이수석은 도저히 못견디겠는지 전대통령에게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표를 냅디다. 그는 사무실의 물건·서류를 정리하고 짐을 챙져 완전히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토요일인 22일 저녁 민정수석실의 비서관들은 자신들이 마련한 송별회에 이수석이 나오지 않자 집으로 찾아가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당시 찾아간 사람은 최재호 (정보· 작고ㆍ 계진곤 (민정· 전안기부1차장)ㆍ 금영진 (민원· 현민자당의원 ) 비서관이었다.
이수석이 사표를 제출하자 청와대분위기는 뒤숭숭해졌다. 바로 이같은 사정을 외국출장에서 돌아와 보고받은 이범석비서실장은 사태를 권력게임 차원에서 파악하는 듯했다.
○…생중계로 해명 지시…○
『이실장은 이수석의 사퇴로 청와대내 갈등이 증폭되고 그것이 출범한지 얼마안되는 5공정권을 취약하게 만드는 분열로 진행될 지도 모른다고 본 것 같았습니다. 그는 파워게임으로 비서진을 개편하는 일은 좋지 않은것으로 판단, 이수석의 사표를 반려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가령 박대통렁시대에 윤필용사건이 권력분열을 가져와 결국 정권에 부담이 된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인지도 모르죠. 두 허씨에 비해 이수석이 이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내 민간인 출신 비서관들과 사이가 좋았던 점도 반영됐지요』(민정당의원 출신 A씨)
이실장이 고민하고 있던 순간, 전대통령은 전석영총무수석을 불러 이수석의 사표수리 문제를 총무처와 의논하라고 지시했다. 사표수리는 불가피한 듯 했다. 일부수석비서관들이 『사표처리를 조급하게 하시면 안된다』는 건의를 아주 완곡하게 했지만 사표수리는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A씨의 증언.
『전대통렁이 사표처리절차를 알아보라고 한 것은 이수석을 그만두게 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전대통렁으로서도 10·26, 12·12를 거쳐 정권을 잡기까지 고락을 같이했던 이수석을 쫓는것이 가슴아팠겠지요. 이런 전대통령의 심리상태를 이실장이 간파한 것입니다. 그는 전대통령의 인간적인 의리존중 기질을 포착, 전원이 사표를 내면 이수석의 사표도 반려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대통령의 두 허수석에 대한 신임과 이수석에 대한 애정을 묶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지요』
○…안기부 대응책 불만…○
이실장의 전략은 하나하나 행동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이· 장사건을 빨리 마무리짓고 심기일전하기 위해서는 참모 전원이 대통령에게 신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요일인 23일 긴급 수석회의를 소집했다. 내심 우려한 것은 이같은 제의를 두 허수석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였다. 회의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사표를 낸 이수석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실장은 외교관다운 부드러운 톤과 매끄러운 논리로 「이·장사건으로 권력비호설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우리가 가만있어서 되겠느냐. 전원사표를 쓰고 일단 신임을 묻자」고 분위기를 잡았다. 그러나 두 허수석은 우려한대로『왜 전원이 사표를 써야하느냐』고 이의를 제기했다.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경직됐다. 이실장은 전혀 동요없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회의를 이끌었다. 인책의 회오리속에서 청와대수석들만 가만있을 수 없는 노릇이라고 설득했다. 김재익경제· 김태호정무2· 이웅희공보수석등이 이실장을 따르겠다며 사표를 먼저 썼다. 그런 분위기에서 두 허수석만 버티기가 어려웠다. 모두 다 사표가 수리될 것으로 믿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실장은 「보필을 잘못했다」는 뜻으로 쓴 사표를 거둬 이날 오후 본관으로 올라가 전대통령에게 갖다냈다. 전대통령은 이실장이 노린대로 청와대비서진의 태도가 가상하다며 이학봉수석의 사표까지 포함해 일괄 반려해버렸다. 『앞으로 더욱 잘하라』고 재신임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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