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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 순국이 항일 투쟁 불 지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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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식이 14일 오전(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 기념관 인근 뉴케르크 교회에서 열렸다. 행사를 마친 뒤 주최 측 관련자와 현지 동포.학생들이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100마리를 날리고 있다. 앞줄 오른쪽은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 [헤이그=김형수 기자]

14일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고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 시내 드용 호텔에서 순국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중앙일보와 헤이그의 이준 열사 기념관은 13, 14일 현지에서 특사 파견 100주년 기념식과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었다. 앞서 13일에는 헤이그 시내 메르큐어 호텔에서 국제 학술회의가 열렸다. 학술회의는 오전.오후로 나눠 각각 '헤이그 특사의 의미와 현재적 조명' '헤이그 독립운동과 한국의 미래'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당시 특사들의 활동은 대한제국을 살리지는 못했지만 그 인도적 정신은 오늘날 자유와 평화를 갈구하는 전 세계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으며, 그 의미가 오늘날에도 퇴색하지 않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당시의 국제체제의 성격상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회의였고 일본의 강압에 맞서 이미 기울어진 국권을 회복하려던 헤이그 밀사들의 사명 또한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노력이었다.

100년 전 헤이그에서는 제국주의 국제질서의 파탄과 조선 왕국의 망국을 알리는 조종이 울리는 드라마가 진행됐던 것이다. 그 종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시작한 20세기의 비극은 결국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35년에 걸친 조선의 식민지화란 캄캄한 역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100년 전 이준 열사의 순국은 그러한 비극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제국주의 경쟁체제에서 강대국 간의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것, 어느 지역에서나 패권국가를 지향하는 강대국의 무리수는 막을 수 없었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왜 그 당시의 세계가 간과하였는지 딱하기 이를 데 없다. 예컨대, 을사늑약에 의한 일본의 조선 강점을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묵인한 결과로 30여 년 뒤 진주만 기습을 당해 버린 미국의 경우도 딱하게 기억될 수밖에 없다. 약소국의 권리를 송두리째 무시하는 제국주의 권력의 역학은 결국 응분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역학이나 지정학적 한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내부 갈등으로 나라의 힘을 소진한 약소국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처절하게 경험한 것이 바로 한국이었다. 그러기에 헤이그 밀사를 비롯한 우국지사들은 국제 경쟁 속에서 우리의 독립을 지켜 갈 수 있는 스스로의 힘과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제국주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국가가 함께 번영할 수 있는 새롭고 정의로운 국제질서 창출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던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를 초월한 새 국제질서의 건설은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한국의 영구한 독립을 담보하는 필요조건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로부터 12년 뒤, 기미독립선언서는 "인류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대기운에 순응 병진하기 위하여" 우리가 새 출발을 시도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인도적 정신'이 새로운 인류 역사의 빛이라고 밝힘으로써 국가 안보와 인간 안보가 연계되는 세계질서 창출에 적극 기여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그것은 곧 100년 전 순국하신 이준 열사의 꿈이었을 것이다.

◆이준 열사=27세에 국가고시에 합격한 뒤 1894년 함흥에서 순릉참봉직을 거쳐 이듬해 신설된 법관양성소를 졸업,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취임했다. 30대 후반에 도쿄전문학교 법률학과(후에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1907년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고 이상설.이위종 등과 함께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됐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의 방해 공작과 열강의 냉대로 회의장 입장을 거부당한 채 장외 외교활동을 펼치다 헤이그의 한 호텔에서 숨을 거뒀다.

주제발표

◆김삼웅(독립기념관장)=을사늑약의 무효와 대한제국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광무 황제의 명에 따라 이상설.이준.이위종이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파견된 지 올해로 한 세기가 지났다. 포츠머스 조약, 태프트-가쓰라 밀약, 제2차 영.일 동맹 등으로부터 미뤄 짐작할 수 있듯 100여 년 전 국제 정세 속에서 주권국으로서의 대한제국의 존재감은 미약했다. 이에 맞서 광무 황제는 1906년 국제사법재판소에 한국 문제를 상정했고, 나아가 이듬해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정의 본격적 출발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열강의 냉대는 확연했고, 상황은 목적지 헤이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장이나 네덜란드 외무대신과의 만남은 성사조차 되지 않았고, 미국.프랑스 등의 대표들은 면담 이상의 도움을 주지 못했다. 특사 일행은 일본의 불법.범죄 행위를 규탄하고 국권 회복을 취지로 한 공고사를 작성, 기자회견을 통해 전달했으며, 각국 신문기자단으로 이뤄진 국제협회에서도 연설을 통한 전폭적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끝내 회의 참석에는 실패했고, 이는 비분강개한 이준 특사의 자결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은 자명했다.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 삼아 일제는 광무 황제 퇴위 결정을 내린 뒤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고 군대를 해산했으나 일련의 침탈 행위는 한국민의 집단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종로 시위, 친일파 가택 방화, 홍순태의 자결에서부터 각 지방 진위대의 의병전쟁 합류, 그리고 국내외의 의열투쟁에 이르기까지 이준 열사의 '자정순국'으로 대표되는 특사활동은 수많은 독립 투쟁의 기폭제로 작용한 것이다.

◆피터 반 덴 둥헌(영국 브래드퍼드대 교수)=1899년과 1907년, 두 차례에 걸쳐 만국평화회의를 주최한 헤이그는 제네바와 더불어 '평화의 도시'로 널리 알려졌다. 이는 주변 강대국들의 무력노선에 대항해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고수하며 국제분쟁의 법적 해결을 주창, 발전시켜 온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국가 특성과도 일맥상통한다.

국제평화 사상은 이들 도시에서 16세기 초반 움트기 시작했다. 이 사상은 국제사회에서의 기독교적 평화 체결을 역설한 에라스무스에서 비롯해 국제기구의 사상적 배경을 확립한 크루세, 국제법의 절차적 청사진을 제시한 펜, 세계 영구 평화를 주장한 칸트, 그리고 유럽연합의 기틀을 잡은 생시몽을 거쳐 19세기 적십자의 창건에 이르러 조직적인 실천으로 이어졌다.

당시 평화에 대한 열망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 주트너의 소설 '무기를 내려놓으시오!'와 세계 최초의 평화박물관을 설립한 블로크의 반전 보고서를 통해 잘 나타난다. 같은 시기, 제2차 세계평화회의 참석이라는 과제를 안고 대한제국으로부터 소규모 사절단과 함께 헤이그를 찾은 것이 이준이었다. 일제의 압력으로 국운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그는 법과 정의를 통해 불법적 침탈의 흐름을 돌리려 했으나 국제평화의 도시에서조차 실력은 이상에 우선했고, 그 결과는 자유와 평화를 주창하는 모든 이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애국자이자 교육자로서의 이준의 생애와 업적이 헛되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그의 희생을 기려 건립한 평화박물관은 대한민국 국민의 조국애와 평화의식을 고취시켜주는 순례지이자 다가올 평화적 통일에 대한 염원을 간직한 곳인 동시에 세계에 평화의 의의를 일깨워주는 교육의 장으로서 평화의 도시 헤이그를 빛내주고 있다.

◆권오곤(전 유고 전범재판소 재판관)=전범의 정의와 그 처벌을 규정하는 국제인도법은 전통적으로 민간인 보호와 전쟁 포로 및 부상자 처우에 중점을 둔 제네바 협약과 전투원에 대한 제 규정을 다룬 헤이그 협약으로 양분된다. 육상 교전규칙을 위주로 확립된 제1차 헤이그 협약은 1899년 만국평화회의를 통해 도출됐으며, 이를 바탕으로 1907년 기존의 국제 관습법을 포함해 반인륜 행위, 대량 학살, 노예제, 해적 행위, 마약 거래, 테러리즘, 인질 위협, 인종차별 등을 규정한 제2차 협약이 공표되었다. 개인에 대한 언급 없이 국가 책임을 명시한 점이 49년 제네바 협약 및 77년의 추가의정서와는 다른 제2차 협약만의 특징이며, 개인 책임은 뉘른베르크의 독일 주요 전범재판에서 최초로 다뤄졌다.

그러나 93년 설립된 국제 유고 전범재판소의 주안점인 개인의 형사책임의 이론적 근거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 설치 규정에 있듯, 후자 역시 1907년 제2차 헤이그 협약에 뿌리를 둔 것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확립된 규정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전쟁범죄를 정의, 처벌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돼 왔고, 이는 현재에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



◆학술회의 참석자

이홍구(중앙일보 고문), 손봉호(서울대 명예교수), 김삼웅(독립기념관장), 피터 반 덴 둥헌 (영국 브래드퍼드대 교수), 권오곤(전 유고 전범재판소 재판관), 이광규(서울대 명예교수), 송상현(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송창주(이준 열사 기념관장), 윤병석(인하대 명예교수), 이용중(동국대 법대 교수)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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