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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세 살 버릇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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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어린 시절 매우 불우했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다. 학생 시절 호객꾼·야채장사를 했다. 형과 동생은 일찍 죽었다. 공부 외에는 그 생활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휘티어대학을 2등으로 졸업했다.(보니 앤젤로, 『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들』) 장학금을 받고 듀크대 법학대학원에 들어가서도 1등에 집착했다. 시험 결과가 너무 궁금했다. 친구 한 명을 꾀어 교수 연구실에 몰래 들어갔다.(윌리엄 라이딩스 2세 외, 『위대한 대통령 끔찍한 대통령』)

 ‘세 살 적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미국서도 들어맞는 모양이다. 닉슨은 대통령이 돼서도 민주당 사무실에 침입한 워터게이트 사건을 저질렀으니 말이다. 닉슨은 주류 사회가 자신을 경멸한다고 생각하고 원한과 적개심을 가졌다.

 노무현 대통령도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어릴 때 가슴에 한과 적개심을 감추고 있었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때 부잣집 아이의 가방을 면도칼로 찢어 버린 일은 그런 사례다. 가난하다고 전부 성격이 뒤틀리는 건 아니다. 링컨은 9살부터 계모 밑에서 훨씬 가난하게 자랐지만 최고의 평가를 받는 대통령이 됐다.

 조선 선비들도 ‘세 살 버릇’을 중요시했다. 중종 때 조광조는 세 살이 된 원자(元子)의 교육을 상소했다. “천자의 큰아들은 낳은 지 3일 만에 선비에게 업혀, 예복 차림의 관리가 하늘에 인사시켰다…일찍부터 가르치지 않으면 안으로 사사로운 뜻에 치우치고, 밖으로 여러 사람 말에 속아 바르게 고치고 싶어도 되지 않는다.”(『중종실록』)

 클린턴은 태어나기 직전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알코올 중독자인 의붓아버지는 어머니와 동생을 때렸다. 14살이 된 클린턴이 골프채로 위협하며 이를 막기도 했다. 심리학자들은 어릴 적 부성애 결핍이 섹스에 탐닉하게 했다고 해석한다.

 미국 언론이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19년 전 교통 범칙금을 내지 않은 사실까지 확인하는 것도 병은 고쳐져도 버릇은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원의원이 될 때는 굳이 들추지 않았던 과거다.

 추적하다 보면 본인이 모르는 일도 나온다. 클린턴은 자서전 『마이 라이프』에서 자기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기 전 세 번이나 결혼했고, 배다른 형과 누나가 있다는 사실을 취임 후 신문을 보고 알았다고 했다. 본인이 모르는 과거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 하지만 대통령직 수행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면 세 살 버릇까지 찾아낼 수밖에 없다.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