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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끝)-시인 이근배|「훈민정음」의 성지 영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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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우리 민족은 왜 위대한가, 우리 역사는 무엇 때문에 자랑스러운가, 이런 물음 앞에서 우리는 한 임금의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오늘 세계 50억의 인류 속에서 반만년 역사를 안고 살아온 7천만 배달겨레가 하나임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것도 한 임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종대왕이 지어낸 훈민정음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말이 있으되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반벙어리로 살았을 것이고 남의 나라 언어의 식민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일찍이 정란지가 칭송하였듯이 우리 겨레가 세종대왕 같은 성군을 만난 것은 「이 나라 억년의 경사」가 아닐 수 없고 그 위대한 업적 또한 「하늘처럼 끝없고 땅처럼 영원한 빛」으로 타오를 것이다.
인류사에도 더불어 어깨를 겨룰 자가 없는 우리의 성군 세종대왕의 장엄한 치적을 우러르고자 영릉(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우대리)을 찾아간다. 더구나 올해는 「책의 해」라니 해보다 더 밝은 한글(훈민정음)을 주신 고마움을 아뢰고 저 한강처럼 도도치 흐르는 한글 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의 한 절도 다시 읊어야하지 않겠는가.

<우리 민족의 성전>
영릉은 오랜 역사가 이 땅의 곳곳에 만들고 간 숱한 임금들의 무덤 가운데 하나일 수만은 없다. 내 나라의 글자인 한글을 읽고 쓰는 우리 겨레에는 자손만대를 두고 받들어야 한민족의 성지이고 숭모와 감사의 마음으로 참배하는 향불이 꺼지지 않는 성전인 것이다..
세종은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손자이며 제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아들로 태조6년(1397년) 5월15일에 태어난다. 이름은 화(도)로 태종8년 충령군에 봉해지고 태종13년 충령대군으로 대자가 하나 더 붙게 되고 태종18년 (1418년) 6월 세자인 양령대군이 행실이 단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영의정 유정현 등이 청원하여 양령을 세자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충령은 세자에 책봉된다. 그리고 그해 8월 세자에 책봉된 지 두 달만에 태종은 왕좌에서 걸어 내려오고 충령을 그 자리에 앉히니 곧 세종 임금이 된다.
이처럼 순서를 바꿔서 세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부터 조선왕조는 물론 이 나라 역사에 아침을 열어주는 하늘의 뜻이었다고 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태종이낳은 양령·효령·충령·성령 네 아들 중에서 장남도 차남도 아닌 셋째를 뽑아낸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더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귄 다툼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보아온 터가 아닌가. 분명코 순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순리가 아닌 것을 순리로 만든 데는 충령의 성덕을 알아본 태종의 밝은 눈과 결단력, 그리고 총명한 아우를 위해 왕위를 스스로 버릴 줄 아는 양령의 깊은 뜻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세종의 위대한 덕치의 뒷 받침이 있었다.
맏아들 양령과 셋째 아들 충령이 자리바꿈 하는 극적 반전을 두고 양령을 보는 두 개의 시각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겉으로 알려진 바대로 양령이 술·여자·놀이에 빠져 유정현 등 여러 신하들이 세자 폐위를 진언해 태종이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태종이 충령에게 마음이 가있는 것을 안 양령이 폐위를 당하기 위해 일부러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는 해석이다.
이 후자 쪽에 단순히 양령에 대한 도덕적 미화로 만 보아 넘길 수 없는 까닭이 있다. 즉 그는 세종이 등극한 다음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고 풍류객 행세를 했으나 왕자의 체통을 잃을만한 짓을 한 일이 없다는 점이다.

<초인적 정치역량>
단순히 양령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면 그 자리는 마땅히 둘째인 효령에게 돌아갔어야 하겠는데 효령마저 관악산 연주암으로 들어간 일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것은 태종의 의중에 따라 세종이 승계하게 되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세종은 과연 이 나라 역사를 드높이 추켜세운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가 재위 32년 동안 이룩한 치적은 이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실천했다고는 믿기 어려운 초인적인 정치역량에서 온 것이었다.
「나랏 말씀이 중국과 달라 글자로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배워 날마다 편하게 쓸 일이다.」 세종 28년 (1446년)에 반포한 이 훈민정음의 전문인 글귀 하나만으로도 동서고금의 역대제왕이 무릎 꿇기에 넉넉하고 이 겨레는 우러러 눈을 뜨기가 어렵지 않은가. 그러나 이밖에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눈부신 업적을 대왕은 이룩했던 것이다.
대왕은 먼저 문화창달과 국가융성의 지혜를 짜낼 수 있는 인재들을 집현전에 모아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를 쌓게 했다. 교육·문화·국방·경제·과학·농업·천문·지리·역사·의학·예의·음악 등을 학문적으로 탐구케 했고 그것을 반드시 실천에 옮겨 나라를 부강 시키고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힘썼다.
손수 지은 책으로 『훈민정음』 『월인천강지곡』이 있고 『용비어천가』도 대왕의 시정신을 옮겨 적은 작품이다. 그밖에 학자들로 하여금 저술케 한 주요 서적들로는 『동국정운』 『석보상절』 『고려사』 『효행록』 『오례의』 『농사직설』 『의방유취』 『경제육전』 『팔도지리지』 『삼강행실』 『역대병요』등이 있다.
국방으로는 대마도 정벌, 사군설치, 육진개척 등으로 남쪽왜구와 북쪽 오랑캐를 막아내었고 교육문화로는 훈민정음 제정, 집현전 학자의 중용, 정음청 신설등 외에 경술·갑인·병진자 등 구리활자의 주조로 인쇄술을 발달시켰다,
농사와 일상생활에 필요한 과학기술의 진흥에 힘써 대소간의대·혼천의·천문도·측우기 등을 발명케 했고 팔도지리지와 함께 지도를 제작했다. 『농사직설』 은 과학영농의 본보기였고 환곡법 등을 제정, 농본주의와 민본정치를 실천하였다.
황희·맹사성·허조·김종서 등은 세종의 덕치를 수행한 명신들인데 특히 황희 정승의 중용은 세종의 성덕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황희는 이조판서로 올라있던 태종 16년(1416년) 11월2일 태종으로부터 양령을 폐위하고 충령으로 세자 책봉할 것을 은근히 의논 받는다. 이때 황희는 「폐장입유 (폐장입유-맏아들을 폐위하고 어린 아우를 세우는 것)는 후일 분란의 씨가 된다」는 이유로 극력 반대한다 2년 뒤 태종이 기어코 충령을 세자에 책봉하자 이를 반대하여 서민으로 삭탈관직, 재산을 몰수하고 남원에 유배 보낸다
이것은 족히 세종의 왕권에 도전한 대역죄로 참형을 당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세종4년 세종은 5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황희를 불러 올려 좌참찬에 앉히고 예조판서·대사헌·우의정을 거쳐 세종13년 영의정으로 등용, 그가 87세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중임을 맡긴다. 보통 임금으로는 흉내도 못 낼 넓은 도량을 알게 하는 본보기다.
정인지·신숙주·이개·성삼문·박팽년·하위지·유성원·최항·양성지·이석형 등 기라성 같은 학자의 배출도 세종의 발탁으로 빛을 보았고 세종의 치적에 공을 세운 이들이다. 전문기계를 제작한 장영실, 악기를 만들고 악보편찬과 작곡을 한 박연 등도 세종과 더불어 길이 새겨질 인물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릴 새 꽃 좋고 열매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칠 새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가나니.
『용비어천가』 제1권 제2장은 언제 읽어도 한 임금의 어진 가르침을 가슴으로 받게 하는 나랏말 나랏 글로 씌어진 최상의 성구다. 세종이 일찍이 지은 한시 『몽중작』에도 그의 생각은 유난히 복되다.
비가 들을 흠뻑 적시니
백성들의 마음이 즐거웁고
해가 서울을 비추니
새 기운 솟아 기쁨이 넘친다
누가 이 많은 축복을 일러
선왕들의 쌓은 덕이라 했던가
오직 내 임금을 위하여
삼가 몸을 바칠 따름이다.(우요교야민심악 일영경도희기신 다경수운유적누 지위오군신궐신)

<예종 원년에 이장>
세종은 재위 32년 세수 54세로 1450년 2월 17일 승하한다. 아버지 태종의 묘소인 경기도광주 헌릉 옆에 장사했다 예종 원년 (1469년) 3월16일 이곳 영릉에 옮겨 묻힌다. 영릉은 회룡고조형(용이 낳아준 산을 돌아보는 모양), 양봉상악형(두 봉황이 즐기는 모양), 비봉포난형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 등으로 다시 찾기 어려운 명당이라고 한다.
본래 이 자리는 이이 전의 묘가 있었는데 천릉 자리를 찾아 나섰던 노사신·안효례 등이 비를 피하기 위해 이곳 묘막에 들렀다가 서기가 비춰옴을 보고 자세치 보니 천하의 명당이라 그 후상으로 하여금 이장케 하고 영릉을 썼다는 일화가 있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사업으로 묘역을 정비, 수라간·정자간·비각등 외에 기념관인 「세종전」 건립되고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졌으며 경내에 앙부일귀 (해시계)·자격누 (물시계)·측우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성지가 된 역사유적은 산 교육의 현장으로 연간 70만명의 참배객이 다녀간다. 그러나 70만명 이어서는 안 된다. 더 많은 이들이 찾아와 아무리 누려도 모자람이 없는 복을 주신 대왕의 큰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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