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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후계자 부상(2)|병약한 김영주대신 정치훈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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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박금철·이효순 사건의 여파가 진정된 것은 67년 말이었다.
그러나 반년도 지나기 전에 「김일성-김영주-다음세대」 후계구도에 대한 두번째 도전이 터져 나왔다. 이번엔 빨찌산 그룹내의 「군사파」였다.
당시 북한의 핵심권력에 있었던 망명자들에 따르면 68년 중반부터 군부지도자인 민족보위상 김창봉, 대남사업 총 국장 허봉학 등이 김영주에 반대해 나섰다. 그 밑에서는 군 특수정찰국장 김정태(김책의 차남)가 움직였다.
이들은 박·이 사건 이후 당권이 더욱 김영주에게 집중되는데 반발했다. 김영주의 과거경력을 문제삼아 그의 지시인 「당적 지도」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거나 저항했다. 경력 짧은 김영주에게 권력의 칼자루를 넘겨줄 수 없다는 태도였던 것이다. 자신들이 항일투정에 몸바칠 때 김영주는 「코흘리개」에 불과했다는 식으로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빨찌산파서 반기>
특히 이들은 대남 사업에 서공을 세워 김일성에게 능력과 충성을 보여 김영주 후계구도를 변경시키려 했다. 그 결과 나온 게 대남 사업상의 좌경 모험 주의적 군사노선이다. 당 지도부에 공식보고도 하지 않은 채 「통일과 남조선혁명 전략 계획」을 수립해 실전에 옮겼다는 증언도 있다. 그 일환으로 68년의 1·21 청와대기습사건이나 10월말∼11월초의 삼척·울진 사건 등을 시도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72년 김일성 환갑 때까지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공로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69년 1월의 노동당 인민군위원회 제4기 4차 확대전원회의에서 숙청됐다.
후계문제를 둘러싼 67∼69년의 심각한 진통은 후계자로 내정된 김영주에게 문제가 있었던 탓이다. 그는 군사파 숙청 후에도 건강·능력의 한계로 후계자로서의 역할을 못해냈다.
김영주는 성격이 원만해 당초 대중적인 신망이 있었으나 정치 안목이 부족했다. 특히 조직지도부장으로 일하면서 좌경으로 흘렸다는 지적도 있다.
이를테면 「성분제일주의」에 빠져 능력 있는 간부라도 성분위주로 차별했다. 「반 당 분자」라는 낙인을 찍어 출당 하는 일도 잦았다. 67년 이후 주민등록 사업 때는 노동계급성·당성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했고 월남자 가족에 대한 처리가 더욱 나빠졌다고 한다. 빈고 농 출신이라도 얼굴 모르는 친척이 월남했다 해서 도급간부나 생산현장의 분조장이 현직에서 쫓겨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60년대에는 「청산리 교시총화」 모임이 농촌 각지에서 진행됐는데 이 회의가 마치 간부교체를 위한 회의처럼 돼버렸다.
북한식으로 말해 군중노선관철에서 좌경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 때문에 70년 5차 당 대회 이후 이를 시정하느라고 애먹은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김영주는 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다. 67년 무렵에는 사무실을 비우고 아예 평남 영원의 묘향산 휴양소(약수터별장)에 가있는 일이 잦았다. 병 치료차 소련·루마니아 등지로 나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당 조직업무가 원만히 수행되지 못했다. 그의 병이 정신질환과 관련돼 업무수행에는 더욱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70년 당 대회 주도>
김창봉· 허봉학 사건 수습 뒤에는 70년11월 열릴 노동당 5차 대회 준비사업이 당면 과제였다. 조직지도부의 임무였다. 그러나 정작 부장인 김영주는 루마니아에 가 3개월쯤 체류, 5차 당 대회 한 달 전에야 귀국했다.
결국 당 대회 준비는 김일성이 직접 맡았다. 그 밑에서 조직지도부 제1부 부장 박수동(김정일의 대학시절 대학 당위원장출신)과 선전선동부 부 부장 김정일이 실무를 처리했다. 이때 김정일이 정치적으로 급성장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김영주가 자리를 못 지켜 나타난 심각한 폐단은 70년쯤부터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치맛바람」이 일기 시작한 깃이다.
69년 1월 당 인민군위원회 확대전원회의 직후인 2월에 김성애는 여성동맹 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그로부터 1년 뒤 여맹 위원장의 월권행위가 뚜렷해졌다. 노동당은 일시에 치맛바람에 휩싸였다고 한다. 마치 김성애가 당위에 군림하는 듯한 경향마저 나타났다.
김일성의 실언이 이를 가속화시켰다. 71년1월의 전국농업대회에서 『김성애의 얘기는 내 얘기와 마찬가지다』라고 말해버렸던 것이다. 이는 김일성 교시와 김성애 발언을 동격시해도 된다는 뜻이어서 치맛바람을 부채질했다. 부수상과 당 고위 지도자들이 김성애를 수상다음으로 대접, 그녀는 마치 2인자인 듯이 행동했다.
권력을 좌지우지할 정도에 이르자 김성애는 김일성의 전처 김정숙을 역사에서 지우는 행동을 개시한다. 김정숙의 흔적 지우기, 김정숙 관련 집필자 좌천 등의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실제로 김정숙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가 노동자로 전락한 사례도 있었다.
김성애는 중국에서 강청이 유소기·등소평 등 혁명원로들을 내몰려고 했듯이 빨찌산 노 간부들을 무시하는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례로 불자공급 규정에 따른 노 간부의 특전을 없애려 했다. 김성애는 김성각·김성호 등 가족을 비롯한 측근을 중용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분파를 이뤄 점차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다. 김성애의 전횡과 여맹 내의 개인 숭배경향에 처음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은 호위국장 전문섭과 그 측근들, 과거에 김정숙과 함께 활동한 백학림·조명록 등이었다. 전문섭과 김정일의 협의에서 「김성애 뒷조사에 착수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김정일은 즉각 당시 조직지도부 중앙지도과장이던 장성택(김정일의 동생 경희의 남편)에게 호위국과 합동으로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김영주가 병석에 눕자 김정일 측과 김성애 측이 불꽃 튀는 암투를 벌였던 것이다. 74년6월 평양시당 전원회의에서 김성애 측이 몰락하기까지 갈등은 계속됐다.
김일성과 빨찌산 그룹은 김성애의 치맛바람도 결국 「김일성-김영주-다음세대」 후계구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했다. 후계자인 김영주가 집무를 제대로 못해 당내부가 시끄러워졌다는 것이다.

<오진우등이 후원>
김일·최용건·오진우·최신 등 빨찌산 그룹과 김영주는 김성애가 김일성을 등에 업고 하는 짓이 모택동의 처 강청의 행동과 흡사하다고 보고 염려했다. 이 과정에서 원로들 사이에선 김영주의 병이 완쾌되기 어렵다면 그의 자리를 다음 세대에 주어 정치훈련을 쌓도록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더욱이 김일성의 건강도 후계문제의 위기감을 부채질했다. 목뒤의 혹이 날이 갈수록 커졌던 것이다.
이 의견은 「김일성-김영주-다음세대」 후계구도의 조정을 뜻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김영주라는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다음세대에서 후계자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혁명 1세대가 활동할 때 다음세대의 후계자, 즉 김정일에게 권한을 넘겨줘 후계지위를 확립하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71년 중국에서 임표 사건이 터지자 후계자 선정의 발걸음은 더욱 바빠졌다.
후계문제는 71년4월 하순 당 중앙위 제5기 2차 전원회의가 끝난 직후에 열린 전원회의 사업결산을 위한 정치위원회 자리에서 본격 거론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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