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확산 러 정국불안/헌법규정 미비/「임자」불분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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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독립후 아직 구소헌법 준용/의회,옐친에 사사건건 제동/“구체제가 낫다”개혁실패로 「향수층」도 급증
러시아 보혁대결이 일족즉발의 위기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보수파의 수장인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상설의회)의장이 지난달말 4월로 예정된 신헌법 채택을 위한 국민투표 취소와 조기 대선·총선 실시를 주장,1개월동안의 소강정국을 깨면서 다시 점화된 보혁대결은 23일 조국수호자의 날(창군기념일) 기념식에서 군부쿠데타와 민중봉기를 촉구하는 주장이 속출했을 정도로 일대파란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최근의 보혁대결에서 보리스 옐친대통령을 지지해온 민주러시아 등 개혁파는 사분오열돼 있는 반면 과거 공산당파·극우민족주의그룹 등으로 분열됐던 보수파는 옐친타도를 위해 공조투쟁을 전개하고 있어 옐친대통령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소련대통령처럼 조기축출될 가능성마저 엿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 정국이 한치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우선 옐친대통령이 지난해초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개혁정책이 대실패로 끝났다(보수파의 주장)는데 있다. 가격자유화로 인한 물가폭등·사회보장 정책의 쇠퇴 등으로 일반국민의 절반 이상이 빈곤선을 밑도는 생활고에 허덕임에 따라 최소한의 생활이 보장되던 구공산체제가 오히려 좋았다는 「향수층」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러시아가 이같은 국내 혼란에 짓눌려 국제무대에서 3류국가로 전락했다는 자괴감 또한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반옐친 감정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됐다. 저명한 역사가인 레오니트 바실리예프는 최근 시사주간지 노보에 브레먀에 기고한 글에서 『몇줌도 안되는 바깥세력들이 대국 러시아를 좌지우지한다면 그것은 바깥세력의 책임이 아니라 러시아 지도부의 책임』이라고 주장,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23일의 반정부 시위에서 옐친이 미국의 첩자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번 보혁대결을 촉발한 또 다른 요인은 러시아의 권력체계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러시아는 헌법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독립 이후 1년이 넘도록 구소련 러시아공화국 헌법을 준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따라 구공산체제 하에서 명목상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최고회의는 공산당의 몰락으로 「임자가 불분명해진」실질적 최고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사사건건 정부정책에 제동을 걸고있다.
더욱이 러시아인들은 1917년 볼셰비키혁명 이래 『모든 권력을 소비예트로』라는 구호에 젖어있다. 소비예트는 일종의 자치회로 그 집합체가 바로 최고회의다. 현 최고회의는 또 지난 90년 3월 제한적 경선을 통해 구성돼 대다수가 공산당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어서 오는 4월의 국민투표에서 옐친이 구상하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골간으로 하는 신헌법안이 채택될 경우 기득권을 잃을 것을 우려,이를 저지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따라서 옐친대통령의 극적인 양보가 없는한 최고회의의 대정부 공세가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 분명하고 군부가 개입할 경우 양측이 무력충돌 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정태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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