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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다시 부는 역사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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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무릇 역사소설은 사실(史實)을 소재로 삼은 소설을 말한다. 이는 오롯이 사전적 정의고, 장르적 특성은 따로 있다. 장르로서 역사소설은 오늘·우리에게 어제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끔, 하여 과거로부터 감동과 재미를 얻게끔 꾸민 이야기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작가가 거짓을 지어낸다는 데 있다. 작가는, 오로지 더욱 그럴듯한 과거를 복원하기 위해 허구를 동원한다.

 한데 요즘의 역사소설은 꼭 그렇지 않다. 김훈의 『남한산성』을 보자. 병자호란을 소재로 삼았지만 소설의 감동은 참혹했던 옛 일을 상기하는 데 있지 않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식의 교훈과도 별 관계가 없다. 『남한산성』은 매우 개인적인 가치를 전파한다. 역사의 한 단면을 살았던 낱낱의 인간 군상을, 그네들이 좇았던 낱개의 가치를 소설은 집요하게 파고든다. 소설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따라서 현대적이다.

 

아무래도 요즘의 역사소설은 과거 복원이란 장르적 사명에 무심한 듯 보인다. 이번엔 신경숙의 『리진』을 보자. 소설은 고종 연간 한 궁녀의 이야기다. 이 궁녀의 존재는, 프랑스 공사가 쓴 회고록에 겨우 세 쪽에 걸쳐 등장한다. 다른 어떤 문헌에서도 리진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신경숙은 세 쪽짜리 기록에서 두 권짜리 소설을 창조했다.

 김경욱의 『천 년의 왕국』은 아예 몇 줄의 기록에서 비롯됐다. 1653년 하멜 등 네덜란드 상인 36명이 제주도 해안에 좌초한다. 그런데 조선에는 벨테브레란 네덜란드인이 26년 전부터 살고 있었다. 벨테브레의 기록은, 하멜의 표착을 알리는 역사 안에서 몇 줄로 존재한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도 소설은,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조선인 박연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희귀 소재를 발굴했다는 것 말고도 신경숙과 김경욱에겐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두 소설 모두 이방인의 눈으로 우리를 들여다 본다. 그 시선이 제법 아프다. 옛 일이 떠올라 아픈 게 아니라 그네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아프다. 어제의 우리가, 오늘의 우리와 다르지 않아 아프다.

 당대의 역사가 외면했던 건 당대로선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그 무의미했던 사건이 오늘·우리의 소설에서 부활한 건,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의미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요즘의 역사소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소설의 전통을 위반한다.

 일제 강점기에도 역사소설 바람이 있었다. 이광수가 이순신과 원효대사의 생을 복원했고, 김동인은 대원군(『운현궁의 봄』,『젊은 그들』)을 다시 불러냈다. 홍명희의 『임꺽정』도 그맘때 나왔다. 당시 역사소설엔 또렷한 경향이 있었다. 일제 치하의 역사소설은 옛 조선의 영웅을 되살리는데 몰두했다. 그땐 그게 옳았다. 옛 영웅의 삶에서 식민지 백성은 위안을 찾았다.

 그러면 지금은? 글쎄다. 아마도 독자가 그만큼 영악해져서 일 것이다. 단순한 과거 재현은 더 이상 독자를 끌어 모으지 못한다고 판단해서 일 터이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요즘의 역사소설은 일단 성공이다.

 그래도 무언가 찜찜하다. 오늘·우리를 말하기 위해 굳이 한참 전으로 시계를 되돌려야 하는 건지, 오늘·우리가 사는 모양에서 오늘·우리를 발견할 수는 없는 건지 아쉬워 하는 말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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