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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환경 개선한 북방외교(노태우정권 5년: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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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러·중 등과 수교… 남북동시 유엔가입 성사/성과 집착 실속없이 서둘렀다는 비판도
노태우대통령의 6공 1기 치적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이 북방정책이다.
러시아·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모두 정상화했을뿐 아니라 미수교상태였던 사회주의국가 등 세계의 나머지절반과 관계를 수립하고,유엔회원국이 돼 절름발이외교에서 벗어났다. 남북간에도 기본적인 신뢰구축이 아직도 안되고 있긴 하나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에 관한 합의서」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성과는 당초 노 정부가 출범할 당시에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일부에서는 세계 조류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집권초기부터 그러한 변화를 잘 포착하고 활용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노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국내의 민주화와 민족적 위상 제고,그리고 통일 번영이라는 세가지 목표를 내걸고 북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88년 7월7일 북방정책의 기본이 된 「민족자존과 통일번엉에 관한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남북관계를 동반자관계로 놓고 사회주의 나라와 관계개선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노 대통령의 목표는 「모스크바와 북경을 거쳐 평양으로 가자」는 그의 발언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통일에 유리한 국제환경을 조성하고,이를 바탕으로 순차적으로 민족내부의 노력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 대통령의 북방정책은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대통령의 「신사고 외교」와 맞아떨어져 매우 빠른 성과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89년 2월 헝가리와의 수교를 시작으로 11월 폴란드,12월 유고슬라비아와 각각 수교했다. 이어 90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루마니아·몽고와 각각 수교했으며,90년 9월 소련과 91년 8월에는 알바니아와도 국교를 수립했다.
이들 보다는 조금 늦어졌지만 90년 10월 중국과의 무역대표부 설치에 이어 92년 8월 외교관계를 맺었고,베트남과도 지난해 4월 연락대표부에 이어 12월에는 국교를 수립했다. 이러한 신속한 외교관계의 확대는 노 대통령 임기중 44개국에 이르는 나라와 국교를 수립하는 기록을 세우게 했다.
그러나 북방외교는 추진하는 방법이나 그 결과의 활용에 있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정상외교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둔 것이다. 노 대통령은 89년 11월 헝가리 방문을 비롯해 여론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나라를 잇따라 방문,북방열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본말이 전도된 정상회담중심의 청와대 밀사외교는 국민들의 비판을 받게되고 외무부 관리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야당의 비난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청와대의 정치적인 고려가 강화됨으로써 야기된 30억달러라는 대소경협자금 제공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북방정책은 북한의 대외·대남정책을 크게 변화시켰다. 북한은 「하나의 조선」이라는 공세적인 통일정책에서 「현상유지」 정책으로 사실상 전환했다. 이러한 북한의 변화로 고위급회담이라는 당국자간 회담이 여덟차례에 걸쳐 진행될 수 있었다. 또 주변강대국들의 대남한정책 변화와 북한의 현실유지정책의 결과로 유엔동시가입이 이루어졌다.
한반도를 둘러싼 4강국들과 모두 관계를 개선함에 따라 동북아지역의 다자간 안보협력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등 이 지역의 질서재편에 발언권을 갖게 됐다. 뿐만 아니라 미수교관계에서 불가능했던 환경 등 각종 지역협력사업들이 활발히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도 사실이다.
노 정부의 초기 외교정책은 상당히 진보적이고 민족주의 색차가 짙었다. 용산미군기지를 교외로 이전하고,남북문제의 당사자 해결원칙을 확립했다. 이러한 입장은 남북관계에서도 강하게 반영돼 상당히 전향적인 통일정책을 추진했다. 때문에 민족대교류 등 각종 정책에서 기존의 보수세력 및 관료조직으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미국의 강한 제동을 받기도 했다.
노 정부는 기본합의서의 채택과 부속합의서 발효,공동위 구성 등 남북관계를 실천단계에까지 끌고 갔다. 남북은 또 비핵화선언에도 합의했다. 그러나 또 다시 모든 대화를 중단한 채 차기정부로 넘겨주게 됐다. 이를 실행하기에는 양측간에 기본적인 신뢰구축조차 안돼 있다는 점을 무시하려는 낙관론에 빠져있는게 아니냐는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노 정부의 지나친 집착은 보수파의 「너무 서두른다」는 공격논리를 합리화시켜주는 약점이 됐다. 북측의 주장처럼 만나기 위한 만남이 돼서는 의미가 없다는 지적에 대해 설득력있는 해명을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노 대통령은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처럼 집권 마지막 무렵에는 다시 미국 의존적인 외교로 되돌아감으로써 북방외교와 대북정책에서 모두 일관성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노 정권이 외교의 장기적인 비전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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