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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콩쿠르 심사한 백건우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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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백건우(61)씨는 거절을 많이 하는 피아니스트다. 영화배우인 부인 윤정희(63)씨와 함께 찍자는 자동차·아파트 광고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파리에서 레슨을 해달라는 개인적 요청도 받지 않았다. 대학 교수로 와달라는 부탁도, 홍보용 사진을 찍어 걸어놓자는 제의도 다 잘랐다.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 위촉이 들어와도 항상 거절하던 그가 이번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심사위원직을 수락한 것은 “세계 최고 콩쿠르에 나오는 젊은이들의 실력을 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국인 피아니스트들도 만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피아노 부문 심사위원장 니콜라이 페테로프는 백씨의 연주를 중계하는 TV를 우연히 보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대회장을 맡았던 로스트로포비치는 생전에 직접 편지를 써 보냈다.

지난달 30일 막을 내린 제13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3주 동안 총 46명의 참가자를 심사한 백씨를 모스크바에서 만났다.

-콩쿠르 심사위원으로의 모습이 낯설다.

“20년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리스트 콩쿠르에 갔었다. 이후 수많은 요청이 들어왔지만 시간이 아깝고 힘도 들어 심사위원직을 거절해왔다. 무엇보다 음악으로 경쟁을 한다는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악은 그 자체로 완결적이다. 나는 음악을 이용해 무언가를 한다는 아이디어를 싫어한다. 음악을 잘하기 때문에 돈을 벌고 출세를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콩쿠르도 그런 맥락에서 거절해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세계 최고 젊은이들의 기량을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나보다.(웃음)”
 
-이번에 얻은 점이 있다면.
 
“46명이 참여한 1차 심사에서는 하루 6시간씩 연주를 들었다. 나중에는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총 80시간 정도 참가자의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몰랐던 곡을 발견하기도 했다. 러시아 참가자가 작곡가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의 곡을 연주할 때 심사위원으로서 보다는 동료 피아니스트로서 매우 흥미롭게 봤다. 이처럼 젊은이들과 나눈 음악적 교감이 내 연주에도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다.”
 
-한국인 참가자들은 어땠나.
 
“안아주고 싶은 아이들이 많았다. 특히 1차에서 2차로 올라오지 못한 손민수(31)의 연주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매우 성실하고 기본기에 충실한 연주를 보여줬다. 손가락 움직임(finger work)은 참가자 중 그 누구보다 좋았다. 왜 떨어졌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다. 콩쿠르란 이렇게 아슬아슬하고 운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목숨 걸지 말라. 탈락 발표가 난 후 차이콥스키 동상 밑에서 우두커니 앉아있는 그를 따로 불러 맥주를 사주며 이야기를 나눴다. 예의바르고 생각이 곧았다. 맥주 값도 자기가 내겠다며 나서더라.(웃음) 상의할 것이 있으면 언제든 나를 찾으라고 했다.

세계 속에서 한국인 피아니스트들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계기였다. 지도를 받으면 성숙한 작품이 나올 수 있는 피아니스들이었다. 1차에 올라왔던 이정은(22)의 라벨, 2차에서 김성훈(29)의 바흐가 아주 훌륭했다. 모든 심사위원들이 감탄했다. 다만 자신만의 색채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피아니스트가 없어 아쉬웠다. 욕심을 버리고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자신이 공부하던 때와 지금의 젊은이들을 비교해 보면.
 
“미국 줄리어드에서 공부할 당시 ‘계속 있다가는 이 분위기에 젖겠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히 유럽으로 떠났다. 나만의 소리를 만들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 필요하다. 인생을 경험하고 자신을 계속 만들어가야 한다. 나무를 기르듯 거름과 물을 줘라. 쓰러졌다가도 일어나는 힘이 필요하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점이라고 본다.”
 
-이번 심사위원 중 유일하게 교수가 아니었다.

“맞다. 대학 교수로만 구성된 심사위원단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를 부른 것이다. 학생을 많이 가르쳐본 사람들과 조금씩 견해가 다르기도 했다. 이번에 특히 한국 참가자들을 보면서 ‘해줄 얘기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사위원들은 연습을 열심히 했다. 우리는 하루종일 음악을 들은 후에도 각자 흩어져 자기 연습을 했다. 게리 그라프만(미국 커티스 음악원)은 모스크바에 와서 두 곡을 새로 더 공부했을 정도다. 대가가 될수록 만족을 모른다.

만날 기회가 많지 않던 세계 각국 음대의 교수들과 교류를 나누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재밌는 일도 많았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은 특히 방향감각이 없어서 우리를 즐겁게 했다. 그리 넓지도 않은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 내에서 길을 찾지 못해 심사위원 대기실에서 무대에 갈 때도 꼭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는 다른 심사위원들을 이끌고 길을 잘못 찾아 한국인 참가자인 김성훈이 연습하고 있는 방문을 열어 김씨를 경악시키기도 했다.(웃음) 즐겁고 좋은 경험이었다.”

모스크바 글·사진=김호정 기자

윤정희씨가 본 남편 백건우
"배고파도 만족할 줄 알아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

윤정희 씨는 “어려서부터 찾던 남자를 만났다”라고 말한다. “속세에 신경쓰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 배가 고파도 만족할 줄 아는 착한 남자”라는 것. 백씨는 유명한 콩쿠르, 화려한 무대보다는 연구하는 연주, 독특한 음악색으로 존경을 받는다. 1972년 라벨의 독주곡 전곡 연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이후 스크리아빈·프로코피예프·메시앙 등을 파고들었다. 200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을 받았다. 파리에 살고 있는 백씨 부부는 자동차·휴대전화·컴퓨터 없이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며 산다.

윤씨는 또 “피아노 연주 인생이 끝나면 우리가 할 일은 두가지”라고 농담을 던진다. “요리를 기가 막히게 잘하고 길눈이 밝은 남편과 레스토랑을 열거나 여행 가이드를 할 수 있지 않을까”라더니 이내 “우리는 계산을 못해서 안돼”라며 웃는다. 지난달 영국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 녹음을 마친 백씨는 오스트리아·영국·중국 등을 거쳐 12월 서울 무대에 선다.

지난달 30일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콩쿠르 시상식. 백건우씨 등 심사위원 전원이 무대 위에 앉아있다.

“적어도 피아노 부문 심사는 공정
1등 없는 건 감동 연주 없었기 때문”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자국 참가자를 편애한다는 지적에 대해 백씨는 "그렇지 않다”며 심사과정을 소상히 밝혔다.

“콩쿠르가 끝나면 말이 많이 나온다. 적어도 이번 콩쿠르의 피아노 부문은 정확하고 공정하게 심사했다. 자신의 제자가 콩쿠르에 나온 심사위원들은 O·X 방식으로 결정한 1·2차에서 투표권이 없었다.

마지막 라운드였던 3차 결선에는 6명이 올라왔다. 다들 1·2차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던 친구들이었는데 1등을 줄만한 감동적인 연주가 없었다. 주최측에서는 ‘스타’를 만들기 위해 1등을 주길 바랐다. 하지만 심사위원 16명은 1등을 줄 사람이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해 소신껏 결정했다. 이 정도로 어떤 입김도 없었다.

이후에는 2등 줄 사람의 이름부터 종이에 적어내는 방식으로 투표가 진행됐다. 러시아의 미로슬라프 쿨티셰프(22)가 12표를 얻어 2위가 됐다. 2차에서도 1위로 올랐던 쿨티셰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이다. 모스크바와 사이가 안 좋은 도시라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에게는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다. 러시아의 자국 참가자 밀어주기를 적어도 나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이 나라 사람들은 차이콥스키·라흐마니노프 음악에 푹 젖어 사는 사람들이다. 다른 나라 참가자들이 따라갈 수 없는 문화가 있다. 가장 잘 연주해야 하는 러시아 음악에서 이 나라 사람들이 앞서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공부를 배로 해야 한다.”

백건우가 젊은 연주자들에게

 -콩쿠르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종류에 따라 꽃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늦게 피기도 한다.

 -무대에서 지나치게 긴장한다면 잠시 잊어라. 나는 백지상태에서 5~10분동안 잠을 잔다.

 -음악에 발전이 없다면 과감히 환경을 바꿔라. 단절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

 -피아노를 잘치는 사람은 많지만 음악을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의 세계를 찾아라.
 
-모든 사물에 호기심을 가져라. 호기심이 없는 예술가는 생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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