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색된 남북관계 “해동”기미/북한 대남책임자 전격경질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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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공작차원 탈피 실리외교 전환/미·일 관계개선 노린 개방신호
북한이 대남업무 책임자를 윤기복에서 돌연 김용순으로 교체한 것은 대남정책의 근본적인 성격변화를 시사하는 것이어서 크게 주목된다.
결론부터 말해 북한이 외교전문가인 김용순을 대남한정책 카드로 내세운 것은 남한과의 대화 물꼬를 트고 이를 근거로 미일과의 관계개선을 꾀해 보자는 유화제스처로 점쳐져 남북관계를 전진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는 북한이 어차피 국제사회에서 고립돼 지낼 수는 없는 벼랑에 몰려있는 만큼 앞으로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북한의 대외개방을 이끌어갈 인물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대남정책의 강경파로 알려진 윤기복이 어쨌든 교체됨에 따라 핵문제와 간첩단 사건으로 경색됐던 남북관계 돌파구가 열리고 팀스피리트훈련과도 상관없이 남북관계가 조기에 재개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어차피 기업인의 방북 등 초보적인 남북경협을 풀 수 있는 길은 핵문제나 팀스피리트훈련 등 난제의 해결에서보다는 북한의 이같은 물밑변화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사실 북한이 대남업무 책임자에 외교전문가인 김용순을 발탁했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은 김일성 신년사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김일성은 신년사에서 통일문제를 풀어 나가는 데는 유관국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전례없이 강조했는데 이는 다분히 미국과 일본을 의식한 발언이라 할 수 있다.
즉 지금까지 대미·대일외교를 주도했던 사람이 김용순인데 미국과 일본을 잘 아는 그로 하여금 남북관계를 총괄하도록 미리 정지작업을 해 두었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김용순의 대남사업 총괄조짐은 작년 12월 최고인민회의 하루 전날 열린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단행된 주요 간부들의 인사에서 어느 정도 나타났었다.
이 인사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한 사람은 김용순·김달현 두 사람뿐으로 김달현이 국가계획위원장으로 대외개방과 대남경협으로 경제정책의 가닥을 잡아가게 했다면 김용순은 대화를 통한 대남정책 책임을 지게 했을 공산이 크다.
또 대남정책도 이제 한낱 공작차원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외교의 틀안에 넣어 다루자는 발상 전환을 해 김용순이 남한을 망라한 관계국들의 외교를 총괄하게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특히 김용순을 대남책임자로 기용한 것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정권교체기에 있는 북한이 김정일 친정체제를 일찌감치 구축해보자는 뜻도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어려운 경제사정 등으로 미루어 전력투구할 부문은 역시 국제부문과 대남사업인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핵심세력이 김정일의 두 오른팔로 불리는 김용순·김달현이라는 것이다.
국제담당을 맡았던 당간부가 대남 담당 업무를 맡았던 선례는 지난 91년 타계한 허담의 경우에서도 찾을 수 있다.
허담은 80년대 중반 전임자인 강경론자 김중인의 바통을 이어받아 조평통위원장으로서 대남업무를 총괄했다. 허담은 그 사이에 남북관계 개선에 상당한 관심을 쏟았고 남쪽과의 밀사외교를 벌이기도 했다. 허가 외교전문가이자 김일성의 친척이었듯이 김용순도 외척으로 역시 외교전문가다.
북한이 경색돼있는 남북관계를 대화국면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외교를 아는 허담을 기용했듯이 현재 교착상태에 접어든 남북관계의 매듭을 풀기 위해 국제통인 김용순을 발탁했다는 얘기가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김용순에게 대남업무와 외교업무를 겸하게 하는 것은 너무 과중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북한관계 전문가들은 『북한이 과거에는 사회주의 국가·제3세계국가·자본주의 국가로 나눠 외교를 펄쳤으나 지금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아프리카 공관 철수 등으로 외교공간이 좁아진데다 북한의 사활이 걸려있는 주변국가와 남한에 대한 외교를 중시하는 차원에서 김용순에게 많은 일을 맡긴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굳이 대남업무 비서의 교체 사실을 발표하지 않았을까.
우선 북한은 원래 당의 비서가 무슨 일을 맡는지 전혀 공개하지 않는다. 게다가 남한·미국 등 주요 상대국들의 대화책임자가 바뀌는 터여서 대화상대방을 보아가며 「비장의 무기」로 김용순을 내놓으려 했을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물론 일부에서는 북한체제의 속성상 대남사업을 담당하는 책임자가 바뀌었다해서 대남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또 대남업무를 해 본 경험이 전혀 없고 당 서열 15위에 올라있는 김용순에게 막중한 외교·대남업무를 과연 한꺼번에 맡겼을까 하는 의아심이 일부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북한의 지도체제 변화가 현재의 어려운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박의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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