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구소 독일계 자치공건설 성공/2백만명 볼가강유역 「제2조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41년 독소전 발발로 나치첩자 오명쓰고 방랑길/89년 복구운동… 독정부 적극지원 러와 협정체결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연해주 한인자치지역 창설계획이 번번이 좌절됐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독일계 주민들의 「볼가­도이치자치공화국」 부활작업은 독일정부의 적극 지원에 힘입어 성공단계에 들어섰다.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3∼4년 전부터 조직적인 볼가공 부활운동에 나선 독일계주민들은 지난해 7월 독일과 러시아 양국정부의 「볼가­도이치자치공화국 부활에 관한 협정」 체결이후 곧 부지선정까지 끝냈다.
이에 따라 중앙아시아 등 구소련권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2백여만명의 독일계주민들중 상당수가 러시아의 볼가강 유역에 자리했던 「제2의 조국」으로 몰려들어 새삶을 시작하고 있다.
볼가공은 1924년 창설됐으나 2차대전 와중인 1941년 독­소전이 발발하자 요시프 스탈린에 의해 곧바로 폐지됐다. 아울러 그곳에 살던 40만명의 독일계주민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오지로 강제 축출되었다. 그대로 둘 경우 나치독일의 첩자노릇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다른 지역에 살던 독일계주민들도 모두 볼가공 독일계와 같은 수난을 당했다. 러시아극동 연해주에 살고 있던 한인들이 1930년대말 역시 스탈린에 의해 일제의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된 것이나 다름없는 수난이었다.
볼가공 부활에는 독일계주민들의 끈질긴 노력이 주요했음은 물론이다. 이들은 89년 3월 전소독일인협회를 결성,구소련정부와 러시아정부에 볼가공 부활의 불가피성을 알리고 독일정부에 대해서도 지원을 호소하는 등 고토회복을 위해 줄기찬 운동을 벌여왔다.
그러나 볼가공 부활은 독일정부의 치밀한 계획아래 이뤄졌다는 것이 대체적 지적이다. 게다가 독일은 표면상 내건 재외교민보호라는 명분보다 독일계 주민들이 독일로 대량 유입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볼가공부활에 보다 적극성을 보였다.
80년대 후반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로 그 지역 독일계주민들이 대량 유입돼 정착하지 못한 채 난민화하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켰던 것이 이같은 논리의 근거다. 실제로 교민담당 최고책임자인 호르스트 바펜슈미트 독일 내무차관은 『독일계 주민들은 구소련에서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되풀이 강조한 바 있다.
독일정부는 또 91년 10월 볼가공 설립추진위원회를 설립,교육시설 등 세세한 항목에 이르기까지 볼가공의 발전상이 담긴 청사진을 마련하고 대규모 지원을 약속하면서 독일계 주민들이 독일보다는 볼가공에 정착하도록 유도해 왔다. 예비단계에 불과한 91년 한햇동안 독일정부가 이들의 볼가지역 정착을 위해 투자한 돈이 1억2천만달러에 이르고 있다. 「부유한 독일」이 구소련권 독일인 문제에 이처럼 적극성을 띠게 되자 아나톨리 소브차크 상트 페테르부르크시장은 91년 9월 한스 디트리히 겐셔 당시 독일 외무장관에게 시외곽에 20만가구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겠다며 독일인자치지역 유치에 나서기도 했다. 레오니트 크라프추크 우크라이나대통령도 비슷한 제안을 한 바 있다. 구소련권 지도자들이 대체로 한인 등 여타 소수민족들의 자치권 확대움직임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던 것과는 판이한 양상이다.
독일이 볼가공 부활을 조건으로 러시아에 상당 규모의 경제원조를 약속했다는 설이 나도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이례적으로 빨리,그리고 순조롭게 진행된 볼가공부활은 독일정부의 이같은 적극 개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또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내용이 담긴 「재러시아 한인들의 권리회복에 관한 법안」이 오는 27일 러시아최고회의에서 무난히 통과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재추진의 호기를 맞고 있는 한인자치지역 설립문제와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정태수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