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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해양시대] 上.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해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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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바다를 지배해야 세계를 지배한다'.

통신.항공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물자의 이동은 여전히 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첨단화된 선박과 항만 등을 직접 살피기 위해 2003년 12월 13일부터 19일까지 현대상선의 5천5백TEU급 컨테이너선 프리덤호(사진)를 탔다. 취재과정에서 들렀던 중국 상하이.홍콩과 대만 가오슝 등에서 해운업을 둘러싼 동북아 국가 간의 치열한 경쟁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 먼동

2003년 12월 18일 오전 4시. 홍콩을 출발해 대만 가오슝(高雄)항으로 항해 중인 현대상선 프리덤호의 브리지(조종실)는 칠흑같이 어둡다. 레이더 화면만이 희미하게 빛난다. "혹시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 작은 배의 불빛을 놓칠까봐 불을 켜지 않는 것"이라는 게 이용혁(李鎔赫.39) 일등항해사의 설명이다.

20피트컨테이너(TEU) 5천5백개를 실을 수 있는 프리덤호는 지금 시속 24노트(약 45km)로 순항 중이다. 화물을 가득 실으면 무게가 6만t이 넘는다. 길이는 2백70m로 63빌딩을 옆으로 뉘어놓은 것보다 더 길다. 이 강철 덩어리가 1백m를 7.8초에 주파하는 속도로 달려나간다. 홍콩에서 가오슝까지 7백km를 달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15시간. 시간당 1백리씩 하루 밤이면 1천리를 간다.

브리지 유리창 밖에는 시속 40노트(약 75km)의 바람이 불고 있다. 출렁이는 침대에서 밤새도록 뒤척이느라 잠을 설친 기자가 "이 큰 배도 흔들리네요"라고 하자 어느새 브리지에 올라온 유성렬(柳成烈.49)선장은 "망망대해에서는 이런 배도 일엽편주지요. 여기는 해안에서 멀지않아 괜찮은 편"이라고 했다. '이 정도야'하는 표정이었다. 인도양이나 대서양 같은 큰 바다에서 이만한 바람을 만나면 해면에서 10m 높이의 갑판은 물론 그 위에 6단으로 쌓아 놓은 컨테이너 위까지 파도가 넘나든다는 것이다. 심지어 갑판 위 컨테이너의 75%가 파도에 쓸려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 해운업계는 3년이 넘는 불황을 딛고 지난해 상승세로 반전했다. 해상운임이 최고 두배까지 오르면서 한진해운의 매출(5조5천억원 추정)은 2002년보다 20% 가량 늘었다. 자동차 운반선 분야를 매각한 현대상선도 매출이 4조원을 거뜬히 넘었다.

오전 6시가 가까워지자 동쪽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온다. 한국의 수출물류를 책임진 '바다의 사나이'들에게 또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 출항

2003년 12월 17일 오후 4시. 새벽부터 10시간 동안 쉴새없이 프리덤호에 1천2백여개 컨테이너를 올리고 내리던 홍콩항의 겐트리 크레인이 뒤로 물러선다.

"올 스테이션 올 스탠바이."

전원 정위치하라는 뜻이다. 전원이래야 해양대에서 실습나온 항해사와 기관사를 합쳐 겨우 스물네명. 이 커다란 배는 컴퓨터가 조종하는 인공 지능체 같다. 예인선의 인도를 받아 부두를 떠난지 1시간. 항구를 빠져나올 때까지 배를 조종한 도선사가 조그만 보트로 옮겨타자 선장의 첫 명령이 떨어졌다.

"풀 어헤드(전속 전진)."

항로를 동쪽으로 잡은 프리덤호의 12기통 6만마력 엔진이 굉음을 내기 시작한다. 지름 8m의 프로펠러가 분당 1백번씩 바다를 가르자 점차 속도가 붙는다.

"24노트, 서(Sir)."

김동후(金東厚.25) 이등항해사의 보고에 선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평선을 응시한다.

컨테이너선은 현대 해양 물류의 꽃이다. 해운업은 크게 컨테이너.벌크.유조선으로 나뉜다. 컨베이어 벨트나 지게차로 짐을 싣고 내리던 화물선은 이제 거의 컨테이너선으로 바뀌었다. 이삼돈(李三敦.44) 통신사는 "컨테이너선은 부두에 대고 짧으면 네시간, 길어야 스물네시간이면 다시 닻을 올린다"며 "항구마다 상륙해 술판을 벌이던 '뱃놈'도 이젠 옛 얘기"라고 말했다.

유럽항로는 부산을 출항, 가오슝.홍콩.싱가포르를 통과해 로테르담(네덜란드).함부르크(독일)를 거친 뒤 다시 그 노선을 따라 부산으로 오는 3만km 바닷길이다. 프리덤호는 56일간의 일정을 90% 정도 소화하고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민우(李敏雨.53) 기관장은 "부산에서 하루 동안 잠깐 가족들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항해에 나서는 것을 세차례 왕복해야 한달여간 한국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북미항로는 상하이.홍콩.가오슝 등에 들른 후 북태평양을 가로질러 캐나다와 미국 서해안까지 왕복한다. 유럽보다 짧지만 이 노선도 6주일이 걸린다.

자동화된 부두와 크고 빨라진 배 덕분에 컨테이너 물동량은 급증하는 추세다. 지난해 세계 컨테이너 물동량은 2억개를 넘어섰다. 원유나 철광석.자동차 등 특수화물을 제외하면 세계 수출입 물량의 97%를 차지하는 규모다. 이 가운데 30%가 동아시아 지역과 유럽.북미 사이의 물량이다. 오션시핑컨설트(OSC) 등 해운 관련 기관들은 2010년까지 세계 컨테이너 물동량이 4억개에 육박하고 동아시아의 비중은 더 높아질 것으로 예측했다. 15세기 대서양을 중심으로 꽃피웠던 '대항해 시대'가 아시아를 축으로 다시 도래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해운업체들의 발전은 눈부셨다. 해방 후 50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등 대표적인 선사들이 세계 9,10위에 올랐다.

그러나 앞날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같다. 주요 외국 선사들은 부산을 국제 주요 간선 항로에서 빼려는 움직임이고, 이미 지난해 물동량에서 부산항을 추월한 상하이(上海)는 새해엔 양산(洋山) 신항만까지 부분 개장하는 등 항만 간의 경쟁도 치열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해운 한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

현대 프리덤호 선상=김창우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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