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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 사외이사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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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외이사 A="반도체사업은 SK텔레콤이 해보지 않은 생소한 분야인데 이걸 하려는 이유가 잘 이해가 안 간다."

▶사내이사="앞으로 휴대전화로 다양한 서비스를 해야 하고 그런 기능은 모두 반도체칩에 넣어야 한다. 특히 휴대전화와 다른 기기의 융합(컨버전스)에 대비하기 위해선 설계 능력이 있는 반도체 회사의 인수가 꼭 필요하다."

지난달 29일 오후 4시 서울 을지로 SK텔레콤 본사 33층 회의실에서 조정남(SK텔레콤 대표이사 부회장) 이사회 의장 주재로 열린 이사회에선 격론이 벌어졌다. 이날 올라온 네 가지 투자 안건 중 3건은 무난히 통과됐지만 비메모리 반도체 회사인 에이디칩스를 인수하는 것을 놓고 사내.외 이사간 의견이 출동했다. 조 의장을 비롯해 김신배 대표이사 사장.이방형 국내영업총괄 부사장.하성민 전무 등 4명의 사내이사, 김대식 한양대 교수 등 8명의 사외이사가 이사회에 참석했다.

SK텔레콤은 지난달 20일 반도체 회사인 에이디칩스의 유상증자에 참여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전환사채(CB)를 사들인다고 발표했다. 그렇게 되면 SK텔레콤은 에이디칩스의 1대 주주가 돼 경영권을 장악하게 된다. 전체 인수 대금은 632억원에 달했다. 이 같은 인수건에 대한 사외이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사외이사 C="반도체 회사와 제휴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나. 직접 인수할 필요는 없다."

▶사외이사 D="계약체결 과정에서 사전검토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외이사의 대부분이 오후 8시를 넘어서도 인수에 부정적인 입장을 굽히지 않자 경영진도 더 이상 반도체 회사 인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 못했다. 오후 8시30분쯤 SK텔레콤 이사회는 투표 없이 안건을 부결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투표를 해봐야 결과가 뻔했기 때문이다. 경영진이 결정한 투자 안건을 사외이사가 뒤집은 것이다. 이사회와 사전 조율하는 과정에서 안건이 아예 올라가지 못하거나 수정.보완되는 경우는 있었어도 정식 상정된 안건이 부결처리 된 것은 처음이라고 SK텔레콤은 설명했다. SK그룹은 2003년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건이 터져 여론의 눈총을 받자 SK텔레콤.SK㈜ 등 주요계열사의 사외이사를 꾸준히 늘렸다.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의지였다. 올해부턴 SK텔레콤 사외이사는 사내이사(4명)의 두 배가 됐다. 이사회에 올라온 안건이 통과되려면 전체 이사의 과반수가 찬성을 해야 해 경영진은 사외이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SK텔레콤의 한 사외이사는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사외이사들이 부정적인 의견을 내 상정되지 못한 안건이 숱하다"고 말했다. 기업지배구조개선센터 정재규 지배구조평가팀장은 "이번 사외이사들의 결정은 이사회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SK텔레콤 이사회가 인수 안건을 부결하자 그 불똥이 에이디칩스 투자자에게 튀었다. 코스닥시장에 상장된 에이디칩스의 주가는 이날 지난 주말보다 2500원(14.93%) 떨어진 1만4250원으로 마감했다. 에이디칩스 측은 "SK텔레콤 이사회 결정에 대한 여러가지 대응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증권선물거래소는 SK텔레콤을 불성실 공시법인으로 지정할 예정이라고 2일 밝혔다. 증권선물거래소 공시총괄 윤권택 부장은 "SK텔레콤이 이사회 부결 사유를 투자자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SK텔레콤은 "지난달 20일 공시에서 이사회와 공정위 승인을 받아야만 계약이 유효하다고 명시한 만큼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거래소가 공시번복이라고 판단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김원배.고란 기자

◆사외이사=이사회 멤버로 참여해 대주주와 경영진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외부 인사를 말한다. 회계사.교수 등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로 기용된다. 매달 일정액의 보수를 받는다. 현재 자산 규모가 2조원 이상인 상장법인은 전체 이사의 절반(최소 3명 이상)을 사외이사로 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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