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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공경제 "조율사" 김재익 수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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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5공 정권의 출범과정에서 허화평·허삼수·이학봉 씨 등 3명의 보안사 대령 출신은 핵심 중 핵심이었다.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역할을 분담하고 있었다. 허화평씨는 기획, 허삼수 씨는 사회기강, 이학봉 씨는 사회안정을 각각 담당했다고 한다. 대권을 향한 청사진작성·연출 면에서는 허화평씨의 역할이 컸고 공직자 숙청 같은 일은 허삼수씨의 몫이었다. 검찰·경찰·안기부 등 기관의 업무중 사회전반에 파급효과가 큰 굵직한 일들은 이학봉 씨가 총괄 조정했다.
이 같은 역할분담은 적어도 신 군부 입장에서는 적절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전두환 장군의「사람 보는 눈」이 간단치 않았다고 추정하는 이들이 많다. 즉 허화평씨의 기획력과 허삼수씨의 추전 력, 이학봉씨의 조정·중재 력을 제대로 활용했다는 지적이다.

<물가부터" 생각 굳혀>
전두환 대통령의 용인 술은 특히 민간출신 중 김재익 경제수석을 전격적으로 중용한데서 빛을 발한다. 10·26이후 극도로 어려웠던 경제상황에서 몇 년 후 세 마리 토끼를 잡게 된 일은 대단한 업적이었다. 「3저 호황 덕분」이라고 깎아 내리는 측도 있으나 세계적으로 보아도 3저 호황의 흐름을 제대로 탄 나라는 몇 안 된다. 뒷날 전 대통령 본인은 80년 당시 경제문제에 대한 중압감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여러 차례 술회했다.
『80년에 대통령이 되고 보니 나라가 망하게 되어 있었어. 나라꼴이 될게 없었어요. 가슴이 철령하고 답답했어요. 제갈공명이면 몰라도 방안이 없더라고. 정치라는 게 국민이 먹고 사는 걸 해결해야지, 국민이 못 산다면 정치가 아니고 횡포 아니냐 이거지. 내가 그 때처럼 고민이 많았을 때가 없었어요. 내가 왜 대통령이 됐나…. 1년간 참 고민 많이 했어. 누구한테 얘기할 수도 없고 얘기해 봐야 뾰족한 비법을 주는 사람도 없고. 그러나 책임졌으니 끌고 가야겠다, 결심을 단단히 하고, 경제는 배우고….』
『내가 학자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먼저 물가를 잡아야 된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고 했어요. 안정과 성장이란, 두 마리의 토끼와도 같아 둘 다 잡으려면 다 놓치기 쉽다는 거였습니다. 내가 전문가가 아니었으므로 결심하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물가가 오르면 남미의 ABC나라들처럼 된다, 그러니 물가를 잡아야겠다, 물가가 올라서 성장을 해봐야 그게 무슨 성장이냐 하는 결심을 확실히 굳혔습니다.…지침을 주면서도 내가 불안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국가 경영이란 시험해 볼 수 없는 게 아닙니까. 일단결심하고는 밀어붙였습니다.』(김성익 저「전두환 육성증언」)
이 같은 과정에서 김재익 경제수석은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전 대통령 본인은 불론 국가를 위해서도 행운이었다. 김 수석에 대해 대부분의 평자들은 지금까지도 극찬을 서슴지 않는다. 혹자는 그의 출중한 실력과 혜안을, 어떤 이는 그의 성직자에 가까운 생활태도와 공인으로서의 귀감 됨을 손꼽았다. 뒤에 설명되겠지만『김 수석에게는 대단히 비정한 면이 있었다』고 술회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대한민국이 다시 얻기 어려운 인재』라는 평가에 공감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시작하면 불도저 식>
전두환 장군의 첫 경제가정교사였던 박봉환 씨(전동자부장관)는『먼저 인플레를 잡아야 한다』는 신념을 그의 학생에게 심어 주었다.『1차대전후 독일의 극심한 인플레는 사회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혼란을 틈타 히틀러가 집권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히틀러를「인플레의 양아들」이라고도 부릅니다』
『레닌도 말했습니다.「자본주의를 무너뜨리려면 사회혼란을 유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그 사회의 통화를 타락시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통화를 타락시키는 것이 바로 인플레입니다』 등등의 비유를 드는 방식이었다. 실권자인 전두환 장군에게는 정보채널이 많았던 만큼 박씨의「경제학습 지도안」이 잘못된 것이라고 딴 죽을 걸어오는 소리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전두환 학생은 경제학 자체에는 무지했지만 줏대하나는 누구보다 강했다. 박봉환전장관의 회고.
『다른 채널을 통해「안정화시책은 결국 경제발전을 저해한다」는 주장들이 전 장군에게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당시 경제상황을 예로 들며 차근차근 설명했어요.「인플레를 무릅쓰고 성장 위주로 가면 결국 장기적으로는 국가와 민족에 손해가 됩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특히 「국가와 민족」부분에 공감하면서「그러면 안되지」라고 결론을 짓더라고요. 아, 육사교육이라는 게 꽤 민족주의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후임자인 김재익 수석은 더욱 강하게 전장군의 머리를 사로잡았다. 안정·자율·개방이라는 5공경제의 기조가 이때 터를 잡기 시작했다.
김재익 씨는 국보위 경과위원장을 거쳐 80년 9월10일 청와대경제수석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국보위·청와대 행에 대해 부인 이순자씨(55·숙명여대 교수)는『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지금은 다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이도 청와대에 들어가 일하면서 제게 종종 이런 말을 했습니다.「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이런 위치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는 게 아니야. 나는 행운아야」라고요. 집 주변으로 산보하러 갈 때도 혹시 호출이 있을지 몰라 삐삐를 갖고 가고, 외국인들을 만나 우리나라 경제를 설명하느라 자기는 식사도 제대로 못하면서도 무척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고「시간이 너무 드는 운동이라 싫다」며 골프는 대통령이 자꾸 권했어도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보필 잘하면 괜찮아">
이순자씨는 또 김 수석이 청와대에 들어가면서『정치자금은 절대로 저와 의논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요구해 전두환 대통령의 다짐을 받아 냈다고 말했다.
김재익 씨의 고향친구이자 대학동창인 L씨는 국보위시절의 김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서로 집이 가깝기도 해(서울반포) 김씨는 저녁이면 슬리퍼를 끌고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어요. 80년은 흉흉한 시절 아니었습니까. 전두환 장군에 대한 세간의 반감도 대단했지요. 나는 김에게 그랬어요.「야, 너 같은 친구가 왜 전두환 같은 자를 받드느냐」고 노골적으로 면박을 주었어요. 그랬더니 이 친구 하는 말이「그게 아니야」 라는 거예요.「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전 장군은 부지런한데다 공정 하려고 애쓰고, 가정 생활 깨끗하고, 밤잠 안자고 나라걱정을 한다」는 겁니다.「곁에서 누가 잘만 보필하면 괜찮을 사람」이라는 거예요. 나는 기가 차「이놈아, 예수 믿으면 예수가 제일이고 부처 믿으면 부처가 제일이라 더니 너 혹시 권력에 취한 것 아니냐」고 했지요. 나는 그때 10·26사건 수사 발표를 하던 군복차림 전장군의 독해보이는 눈매가 좋지 않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어요. 그랬더니 김은「여하튼 지금 상황에서 그 양반을 대체할 권력자가 있느냐」고 되묻더군요.』
김재익 씨는 1938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9남매 중 막내로 모친이 43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터라 부인 이씨가 가끔「당신은 노인아들」이라고 놀렸다고 한다. 6·25 전란 중에 부친이 희생됐고 형들 중 3명도 그 와중에 행방불명되었다. 독실한 카톨릭 집안으로 김씨의 곧고 맑은 성품이 종교의 영향 때문이라고 짐작하는 이들이 많다. 누나 중 2명은 수녀로 각각 성심여대학장·성심수녀원 원장을 지냈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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