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망 피해 출국기도” 추측/정주영대표 왜 몰래 나가려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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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소환장 발부되던날 모든 일정취소 경주행/운동복입고 호텔나서 눈길적은 「김해」 선택/“휴식차” 해명에도 실언·번복잦아 설득력 약해
정주영 국민당대표는 경주로 쉬러간다고 서울을 떠난 그 다음날(13일) 왜 몰래 우리나라를 떠나려 했는가.
국민당측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온 분이기에 일본정도는 옆집 드나들듯 다닐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잠시 쉬러 가려했던 것인데 왜들 출국을 금지시키고 호들갑이냐』고 애써 의미를 축소하려 한다. 오히려 당국의 출국금지를 「야당탄압」이라고 몰아붙인다.
하지만 이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다. 우선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 지금 정 대표가 갑자기 외국으로 나갈 이유가 없으며,또 공당의 책임자가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고 나가려 했다면 그만한 속사정이 있을게 뻔하다. 꼭 쉬러 나가려했다면 적어도 측근으로 통하는 주요 당직자들에게는 못알릴 이유가 없다. 당직자들은 보도진의 논평요구를 받고 비로소 『그게 사실이냐』며 깜짝 놀랐다. 더욱이 지금은 현대중공업에 대한 검찰의 수사로 연일 떠들썩하고,급기야 출국을 시도한 13일에는 정 대표 자신에 대한 검찰의 소환장까지 발부돼있던 상황이다.
그렇다면 정 대표가 출국하려고 한 진짜 이유가 있을게 틀림없다. 아직 정 대표 스스로 말하지 않고 있고 설사 말하더라도 신뢰도가 떨어져 전후사정을 통해 추론하는 것이 더 객관적일 수 있다.
우선 정 대표가 상당히 은밀하게,급하게 출국을 시도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 정 대표는 당초 13일 경주에 쉬러갈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2일에는 전방위문방문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12일 아침 갑자기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경주로 떠난다고 발표했다. 발표를 지시받은 변정일대변인도 『보도진에 뭐라고 얘기하나』며 이유를 몰라 곤혹스러워했다는 후문이다. 오전중 떠나려던 정 대표는 『김동길박사를 만나보고 떠나라』는 김정남총무의 간곡한 권유에 못이겨 이날 오후 3시 김 박사를 현대영빈관에서 만난뒤 곧바로 경주로 떠났다.
같은 시간 검찰이 발부한 소환장이 속달로 배달됐다. 이날 오전 현대중공업의 최수일사장 등 관계자들이 검찰에 자진 출두했다. 소환장은 이들에 대한 수사가 끝난뒤인 13,14일께 발부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이날 오전 갑자기 발부됐다. 정 대표는 경주행의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운동이나 하면서 쉬러간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대선에 패배해 목표가 없어졌다』며 『아침 일찍 일어나지만 책도 읽지 않는다』고 세상이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경주에 도착한 그는 현대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낸뒤 다음날 아침 운동복차림으로 『조깅하러 간다』며 보도진을 따돌린뒤 호텔을 나와 몰래 차를 타고 울산으로 떠났다. 그를 17년간 따라다니던 분신인 이병규특보가 사전구속영장을 피해 잠적한 현재 비서실 수석역을 대신하고 있는 김인재차장은 미리 출국준비를 갖춘뒤 합류했다. 오후 3시15분발 오사카(대판)행 일본항공을 예약한 뒤 출발직전인 오후 3시5분쯤 김해공항에 도착했으나 수속시간이 없어 티킷을 얻지 못했다. 다시 오후 4시40분발 후쿠오카(복강)행 일본항공을 예매해 출국수속을 하던중 뒤늦게 이를 알고 취한 법무부의 출국금지조치로 발이 묶였다.
간추려보면 정 대표는 소환장이 예상보다 앞당겨 발부되자 곧바로(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경주로 떠났으며,보도진을 따돌리고 일부러 외국항공사를 골라 감시가 느슨할 것으로 계산한 김해공항을 통해 비밀출국하려다 실패한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 볼때 정 대표는 검찰의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출국을 시도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도 「1차 소환장」 정도에 『대통령후보까지 나섰던 공당의 대표가 비밀출국을 시도했어야 했느냐』는 의문은 남는다.
이 부분은 정 대표의 심리로 해석해볼 수 밖에 없다. 다름아닌 「의욕상실」과 「피해의식」이다. 스스로 『목표를 잃었다』고 언급했듯 정 대표는 대선패배후 왕성했던 의욕을 상실,주위에서는 「사냥감을 잃은 호랑이처럼 보인다」는 얘기가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정 대표의 피해의식은 이미 여러곳에서 읽혀져왔다. 지난해 5월 대통령후보지명 전당대회를 『다른 당이 다 한뒤 하겠다』고 했다가 서둘러 다른 당보다 먼저 치르고 정 대표 자신이 후보가 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당시 한 측근은 『빨리 대통령후보가 돼야 안기부에서 나를 잡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정 대표의 불안해하는 심정토로를 들었다고 회상한다. 이후에도 정 대표는 여론조사를 안믿는 이유에 대해 『안기부에서 감시해 국민당을 지지하는 사람은 지지한다는 얘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민당 지지는 항상 낮게 나온다』며 『안기부 안무서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되묻곤 했다.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피해의식은 일반인의 상식이상이란 것이 정 대표를 잘 아는 사람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평생 사업해오면서 그는 항상 권력의 곁에 있어왔다.
그러나 정 대표 자신이 「고해성사」하듯 1백% 속마음을 털어놓기전에 그의 비밀출국시도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비밀출국시도 자체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기 때문에 정 대표 자신의 고해성사는 기대하기 어렵다. 설사 고해성사를 하더라도 계속되는 실언·번복으로 그의 언행은 액면대로 믿기에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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