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재편집」영화 잇단 개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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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한편의 영화는 온전히「작가」인 감독의 몫인가. 흥행 성공이라는 부담을 항상 짊어지고 있는 자본주의 영화산업에서 영화감독의 위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저하게 만든다.
최근 미국영화계에 이른바「감독편집 판」(Director's Cut) 재개봉이 잇따르고 있는 현상은 「작가」로서의 감독에 대한 재평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원래 개봉 당시 제작자나 영화사가 흥행 성적을 올리기 위해 감독의 의사를 무시한 채 편집한 영화들이 그 직접적인 피해자인 감독 자신의 손에 의해 제 모습을 찾게 된 것이다.
82년 개봉된 SF영화『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가 감독인 리들리 스콧의 재편집 판으로 지난해 말 미국·일본 등지에서 개봉되었고 개봉당시 4시간 짜리 단축 판으로 상영되었던 세르지오 레오네의『원스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도 최근 6시간 짜리 완전 판으로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또 73년 개봉된 샘 페킨파의 마지막 서부극『빌리 더 키드』(Pat Garret And Billy The Kid)도 원래의 감독 편집 판으로 비디오가 발매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21세기 핵전쟁 이후의 황폐해진 로스앤젤레스를 무대로 노동자 수용소에서 탈출한 인조인간들과 그들을 추적하는 사립탐정의 대결을 그린『블레이드러너』는 개봉당시『시각적으로 놀랄 만큼 참신한 영화』라는 비평가들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스필버그의『E. T.』에 밀려 흥행에서 참패했던 작품이다. 이번 감독편집 판에서는 원작의 장점인 현란한 세트 구성, 음울한 조명등을 그대로 살리면서 원작의 필연성 없는 해피엔딩을 모호한 결말로 바꿔 버린 것이 특징으로 82년 당시보다 더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둬「감독편집 판」이 진지한 영화팬들에겐 환영받는다는 것을 입증했다.
페킨파의『빌리 더 키드』감독편집판도 극장 개봉 판과 줄거리 구성이 완전히 달라 제작자의 횡포가 얼마나 극심했던가를 확인해 주는「산 증거」로 꼽히고 있다. 페킨파는 주인공 패트 개러트의 회상으로 영화를 구성,「서부 영웅주의의 종말」을 암시하려 했는데 극장 개봉 때 회상 부분이 몽땅 잘려 나갔다는 것이다.
감독편집 판의 잇따른 개봉은 상품·예술사이를 방황할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대중매체의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특히 이는 거대자본이 움직이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감독이 자신의 예술적 의도를 일관되게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뛰어난 스타일리스트들은 결국 살아남는다는 것을 새삼 재확인 시켜 주는 현상이다.
또 이는 한 영화에 대한 평가가 극장 상영보다 비디오 혹은 케이블 TV등 매체에 더 많이 의존한다는 영상문화 상황의 새로운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감독편집 판으로 다시 선보이는 작품들이 예외 없이 비디오·케이블 TV등으로 팬들의 지지를 방은 영화들이라는 점은 이를 잘 입증해 준다. <임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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