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진홍의소프트파워

마감시간의 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2007년 올해가 오늘로 반환점을 돈다. 새해가 시작된 게 엊그제 같은데 정말이지 시간은 쏜살같다. 또다시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세밑이 코앞에 올 것이다. 그러면 또 한 살 더 먹으며 늘 하듯 또 다짐할 것이다. 새해엔 정말 잘해 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오늘 같은 반환점에 다시 서게 되면 그동안 뭘 했나 하는 자괴감이 해마다 겪는 해일처럼 덮쳐올 것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한 해 두 해 살다 보면 어느새 꼼짝없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혼자 힘으로 양말도 신지 못하게 되는 그런 삶의 종착역을!

너나없이 삶의 종착역이 있듯 누구에게나 마감시간이 있다. 어떤 이는 매일 또는 한 달에 한 번, 또 누구는 분기별로, 또는 일 년에 한 번 마감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삶 자체의 마감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나마 매일, 매달, 매 분기, 매년의 마감시간은 그것이 언제인지를 알 수 있지만 정작 자기 삶의 마감시간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며칠 전 캄보디아에서 있었던 가슴 아픈 비행기 추락 사고는 우리 삶의 마감시간을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음을 새삼 절감케 한다. 비행기 트랩을 오를 때 그것이 마지막 가는 길이라고 알면서 오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 예측 불가한 삶의 마감시간을 향해 우리는 너나없이 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마감시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신문사만큼 마감시간에 충실한 곳도 없다. 아무리 좋은 글, 좋은 기사라도 마감시간을 넘기면 소용없는 법! 그 마감시간 안에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매일 발행되는 신문에서 기사가 채워지지 않은 채 군데군데 흰 여백으로 구멍 난 신문을 내는 경우가 없듯이 어떻게 해서든 마감시간에 맞춰 수많은 기사와 글이 속속 들어온다. 마감 10분 전까지도 안 될 것 같던 글들이 야구선수가 죽기 살기로 홈에 슬라이딩하듯 마감시간에 맞춰 슬라이딩해 들어온다. 바로 이것이 ‘마감시간의 힘’이다.

그렇다면 정작 마감시간이 갖는 힘의 원천과 비밀은 뭘까?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긴장감의 활성화를 통해 죽을 힘을 다해 끝까지 뛰게 만드는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물론 사람이 너무 긴장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적절한 긴장은 그 사람을 윤기 나게 만들 뿐 아니라 일의 흐름을 촉진시킨다. 그래서일까? 마감시간에 쫓기듯 쓴 글이 여유 잡고 쓴 글보다 낫다는 속설도 있다. 정말 그렇다면 아마도 긴장한 가운데 자신의 잠재역량을 총동원해 젖 먹던 힘까지 다 불러내 쓰기 때문이 아닐까.

삶은 그 자체로 마감시간을 향해가는 열차와 같다. 때때로 이런저런 역들에 서기도 하지만 결국 언젠가 마주할 그 마감시간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마감시간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비장감 속에 더 열심히 달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내 안의 위대함을 깨운다.

때로 우리 삶은 그 자체가 마감시간이 입력된 시한폭탄과 같다. 마감시간이 되면 터져 버리는 시한폭탄 말이다. 물론 어떤 경우엔 그 마감시간이 너무나 급작스럽게 닥쳐온다. 멀쩡히 살아서 타고 오른 비행기가 몇 시간 후 형체도 없이 산산조각 나듯이 말이다. 그러니 별 수 없다. 매 순간순간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사는 수밖에.

마감시간은 끝을 뜻한다. 하지만 끝에 서면 오히려 강해진다. 비장해지기 때문이다. 이 지루한 장마 속에 넋 놓고 있지 말고 시시각각 지금 이 순간이 마감시간이란 긴장감을 갖자. 그것이 우리 안의 숨은 위대함을 깨워 어제와 다른 삶을 우리에게 선사할 것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