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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돌파력 뛰어난 「감의 승부사」(김영삼당선자 스토리: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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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포용력 커 인연맺으면 평생동지/웬만한일은 주변 인물에 재량권/원리원칙에 충실한 낙관적 성격/“반전의 명수”… 여론정치 가장 중시
김영삼민자당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민문정치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가 앞으로 5년간 어떤 방식으로 통치할 것인지,정치철학과 경제관·통일관은 무엇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비록 정당간 정권교체가 아닌 집권당내의 권력승계 모습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집권은 정권교체에 버금가는 대변화를 의미한다.
40년 정치생활중 대부분을 민주화투쟁으로 보낸 그의 투사적 기질과 정치스타일에 반발,상당수 민정계정치인들이 민자당을 탈당했고 노태우대통령마저 당을 떠난 상태에서 그는 청와대에 입성한다. 김 당선자의 정치적 체취는 기존여권인사들과는 다분히 이질적인 점이 적지않다.
그가 어떤 통치스타일을 보일지는 그동안의 정치행태를 통해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다. 25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지금까지 정치인으로서 공개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의 사고와 정치철학은 대부분 노출돼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위기의 남자」다.
위기에 봉착하면 특유의 돌파력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한번 공격목표를 설정하면 먹이를 쫓는 사자처럼 웬만한 장애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전력을 다해 돌진한다. 그의 위태로운 승부수는 대체로 성공을 거두었고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그를 「감의 승부사」라고 부른다.
○유리한 상황 조성
그는 또 반전의 명수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못할때 여론에 기대거나 전혀 예상 못했던 사건을 만들어 상황을 유리하게 바꿔 놓는다.
3당합당이후 민자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그는 이런 면모를 아낌없이 과시했다.
90년 10월 자신의 서명이 들어있는 내각제합의각서가 신문에 보도돼 곤경에 빠지게 되자 그는 『공개하지 않기로한 약속을 저버렸다』고 오히려 노 대통령을 「약속위반」이라고 뒤집어 씌우고 『사나이의 약속은 무덤에 가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마산행을 택했다. 거기에서 그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말로를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노 대통령의 퇴임후를 위협,결국 각서자체를 무효화시켰다.
91년 8월 제주파동과 92년 8월 제2이동통신 사업자선정 취소과정에서도 그는 때로는 탈당의 배수진으로,때로는 여론을 업고 노 대통령을 압박해 목적을 달성했다.
지난 74년과 79년 야당의 당권을 놓고 라이벌인 이철승씨와 격돌했을 때도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이씨를 「사쿠라」로 몰아 객관적으로 열세인 싸움에서 역전승을 거뒀다. 민자당내 소수계파의 보스로서 수적인 열세를 극복,후보와 총재직을 쟁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절대절명의 위기의 늪에 빠졌다고 생각되면 빠져나오려고 버둥대다 더 깊이 빠져드는 우를 결코 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을 지키면서 주변상황의 변화를 기다리거나 여론의 시선을 끌어들인뒤 「깜짝쇼」를 연출,단한번에 수렁에서 탈출한다.
여기에는 결단력과 판단력,힘의 응집력,돌파력 등이 겸비돼야 한다.
따라서 김 당선자는 대통령 재임중 위기상황이 닥치면,이를 타개해 나갈 기본능력은 이미 갖춘 셈이다. 다만 국가의 위기상황은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보다 치밀한 사전준비가 요구된다.
그는 또 수십년간의 야당생활을 통해 여론정치를 체득한 인물이다.
힘없는 야당정치인이 무소불위의 독재정권에 정면대항하기 위해서는 말없는 다수의 침묵의 소리를 읽고 이를 무기화하지 않으면 생존조차 어렵게 된다.
따라서 그는 여론의 향배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여론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끊임없이 이슈를 만들어 그 중심에 서있고 싶어 한다.
3당합당을 결행하게된 배경에 대해 민주계의 한 의원은 『당시 제3당으로서 평민당에 밀려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을 참지 못했던 것도 큰 이유』라고 설명했다.
지난 70년 「40대기수론」을 내걸고 야당후보지명전에 출마를 선언한 것에서부터 83년 정치규제에 묶여있던 시절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인 것 등도 그의 기질과 무관하지 않다.
유신정권과 5공정권에 대해 정면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국민들의 잠재된 민주화 열망을 감지해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나의 결단』이란 저서에서 「정치적 결단을 할때 그 밑바탕은 늘 민심에 두었다. 그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고 자신의 정치를 여론정치라고 주장했다.
그가 청와대에 들어가더라도 여론에 귀기울일줄 아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이때문에 가능하다.
중대사안을 결정할 때는 광범위한 여론수렴과정을 거친다. 강경파와 온건파를 모두 만나 얘기를 듣고 학자와 언론인의 의견도 듣는다.
그러나 최종결정은 토론을 거쳐 다수결에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판단에 의존한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무섭게 몰아친다.
○“사람 잘 골라써야”
이런 정치스타일은 최고통치자로서 장점일수도,단점일 수도 있다.
더구나 그가 대부분의 정치생활을 야당투사로 일관해온 탓에 중요정책의 방향을 결정할만한 지식과 경험을 갖추지 못해 자칫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독서보다는 학자들을 많이 만나 귀동냥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편이다.
따라서 그의 지식은 단편적일 수 밖에 없고 『한 주제로 길게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구사하는 어휘가 다양하지 못하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말주변은 좋은 편이 아니다.
이 때문에 그의 주변에 어떤 인물이 모이느냐에 따라 정책결정도 영향을 크게 받을 것으로 보인다.
김 당선자는 『최고통치자가 만물박사일 필요는 없다』며 『사람을 잘 골라 쓰는 용인술이 중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인사가 만사」라는 그의 말처럼 참모진과 내각구성의 내용에 따라 통치내용도 달라진다. 5공초 전두환대통령은 김재익경제수석이란 뛰어난 「경제가정교사」를 둠으로써 물가안정이란 치적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김 당선자는 어장주를 아버지로 둔 유복한 가정의 외아들로 자란 때문인지 인간관계에서 여유가 있으면서도 자기중심적이란 평을 듣는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상대가 떠나지 않는한 평생을 같이한다. 서석재·서청원·김덕룡·문정수의원 등은 그의 비서출신이다.
자기에게 온 사람을 결코 내모는 일이 없다.
그래서 그의 비서실은 늘 인사적체로 비만형이다.
이들은 그대신 김 당선자에게는 철저히 충성한다. 그도 당료들보다 이들과 접촉하는 시간이 많고 이 때문에 그의 정치스타일은 「측근정치」라고 비판도 받는다.
이런 속성이 청와대로 연장될 경우 자칫 내각의 말보다 비서진의 입김이 드세질 위험소지가 없지 않다.
그는 또 중대사안이 아니면 대체로 주변인물들에게 재량권을 많이 주는 편이어서 각료들도 소신을 갖고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스스로 『웬만해서는 단명장관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일단 그와 가까워지면 어지간한 실수나 잘못은 『문제야 문제』라는 한마디만 들으면 그냥 덮고 지나가는 것도 그 주변에 사람이 몰리는 큰 이유일 것이다.
토론에는 약하지만 그와 독대를 두어번 한 사람들은 대체로 그의 편이 된다. 대화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는 단순성과 친화력이 그에게는 있다.
김윤환의원은 이런 김 당선자를 『여백의 미가 있는 정치인』이라고 평했다.
그를 만나면 보호해주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김 당선자는 원칙에 충실한 원칙론자다.
국회의원 최다선(9선)의 경력이 말해주듯 의회주의자이며 야당 원내총무를 다섯번 역임할 정도로 협상과 대화를 중시한다.
그러나 『원칙에 대한 타협은 야합』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유신이후에는 골프를 그만두었지만 그 이전에 필드에 나갈 때는 같이치는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규칙을 지켰다는 것이다. 숲이나 모래에 공이 들어가면 조금씩 옮겨놓고 치는 사람이 많은데 그는 어떤 경우에도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또 적을 많이 만들지 않는다. 목표물을 한 군데만 설정해놓고 집중적으로 난타한다.
3당합당이후 끊임없이 민정·공화계의 포위속에 내각제에 시달렸을 때도 다른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노 대통령만 겨냥,번번이 성과를 얻어냈다.
유신정권말 김종필씨의 재산을 조사,수백만평의 농장을 소유한 사실을 알아냈으면서도 측근이 폭로하려 하자 이를 만류했다. 적을 많이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치열한 민주화투쟁과 여권내 권력투쟁속에서 그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법이다.
그때 만약 폭로했더라면 당내후보경선과정에서 김종필대표가 김 당선자쪽에 설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낙관주의자다.
○적 많이 안만들어
김대중씨는 그를 『매사에 터무니없이 낙관적이어서 때로는 부럽기도 하지만,때로는 아슬아슬하다』고 평가한바 있다.
김 당선자는 이에 대해 『세상일은 크게 줄기만 잡으면 단순하게 보는 것이 옳을 때가 많다』며 『나무에 너무 집착하면 숲이 안보인다』고 주장한다.
중간절차를 생략하고 바로 결론에 이를 수 있는 직관력을 갖고 있지만 논리적 기반이 없는 탓에 상황이 바뀌면 적당한 구실을 붙여 팽개치고는 다음날부터 완전히 잊어버리고 새 활로를 찾는 스타일이다.
87년 대선패배후 『국민주권을 도둑질한 파렴치한 정권과는 같이 국정을 논할 수 없다』고 해놓고는 90년 3당통합때는 그 스스로 『구국의 결단』이라고 방향을 1백80도 선회했다.
김 당선자는 『대통령이 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호언했다. 후세들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만들겠다는 의욕도 보였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얘기를 유세때마다 강조했는데 그의 담백한 금전관이나 친인척의 정치참여를 가능한 억제한데서 볼 수 있듯 이권에 개입하는 대통령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경제관은 『열심히 일 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정도 이외에는 아직 뚜렷한 골격이 서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재벌중심의 경제정책을 반드시 시정하겠다면서도 금융자율화를 얘기하고,과열건축경기의 폐해를 보았으면서도 재임 5년동안 3백만채의 주택공급을 약속했다.
2년내 물가 3%로 안정,국제수지의 흑자전환 등을 내걸었으나 당정책브레인과 정부측의 자문을 받아 공약한 것일뿐 김 당선자 스스로 구체적 복안을 가진 것은 아니다. 대기업의 소유집중 분산과 계열기업간 상호지급보증의 단계적 축소방안 등은 정부의 7차5개년계획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몸에 밴 여성존중
또 「강력한 정부론」과 기업에 대한 정부의 규제·간섭을 최소화한다는 「작은 정부론」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렇지만 김 당선자의 유세과정에서 나타난 경제관을 종합해보면 대기업이 정치에 참여하는데 대해서는 비판수준을 지나 분노를 느끼고 있으며 중소기업을 살려야 한다는 인식은 분명한 것 같다.
김 당선자는 또 지역감정문제에 대해 『한국병중 가장 만성적인 고질』이라고 규정하고 「능력위주의 인사개혁」「대담한 인사조치」를 통해 해소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재임기간중 자연스럽게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것』으로 전망하고 『남북상호핵사찰을 북한이 수용하지 않으면 주변강대국과 유엔안보리를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실현시키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김 당선자는 지난 6월 여성단체협의회에서 『집권하면 전국의 부지사·부시장을 여성으로 임명하겠다』고 공언했는데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힘든 환심성 득표전략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다만 남녀차별을 없애는 법 개정을 약속한 것은 지켜볼 일이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모성지향적 여성관을 갖고 있으며 부인 손명순여사의 강권으로 일요일엔 교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등 여성을 존중하는 생활태도를 견지해 왔다. 그러나 밖에서 활동하는 여성보다는 현모양처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민주화과정에서 흐트러진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시들어가는 경제에 생명수를 공급하는 한국병을 치유한 「명의」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다.<김두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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