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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문화재-전통 기·예 맥 잇는 무형문화 거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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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 짚신장수 부자가 살고 있었다. 밤새워 짚신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는 이 부자는 주위에서 좋은 물건을 만든다고 소문이 나있어 생계를 꾸려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가 만든 짚신은 시장에 내놓기가 무섭게 팔려 나가는데 아들이 만든 것은 시장이 문을 닫을 무렵이 되어야 겨우 다 팔린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만드는 것과 똑같이 만든다고 자부하는 아들로서는 이것이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의문에 아버지는 침묵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아들은 갈수록 궁금해져 견딜 수 없었다.
임종을 앞두고서도 아버지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야 아버지는 단 한마디『털』이라는 말만 남긴 채 세상을 하직했다.
아들은 그 말의 뜻을 알 길이 없어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한참 후에야 아들은 그 말이 「짚신의 잔털」을 뜻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무릎을 친다. 미세한 잔털을 잘 제거하지 못해 자신의 짚신이 별로 팔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서야 안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한국사회에서 문화 전승이 얼마나 원활하지 않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설화다. 자신의 피붙이인 아들에게도 비결을 쉬 털어놓지 못하는 이 완고함은 얼마나 지독한가.
한국 문화에는 문화적 축적이 잘 이루어지지 못한다는「나쁜 전통」이 있다. 잦은 외침 탓이나 정권교체의 빈번함만으로 이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어떤 학자들은 한국문화가 갖는「정거장 문화」라는 특징으로 이를 설명하기도 한다.

<문화 전승 잘 안돼>
중심부의 문화가 주변부로 전달되는 정거장 역할을 한국문화가 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문화가 축적되는 곳이 아닌, 거쳐 지나가는 곳이기 때문에 전통문화의 계승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개항이후 전통 문화의 단절을 강요받아야 했던 불행한 근대사에 의해 이러한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인간 문화재는 문화축적의 빈약함이란 한국 문화의「약한 고리」를 그나마 끈질지게 지탱해주는 버팀돌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우리 삶이 서구화되어가면서 날로 소실되어 가는 전통문화의 맥을 하나의 제도로서나마 보존해야 된다는 필요성에 의해 인간문화재는 등장한 것이다.
사실 인간문화재는 지극히「한국적인」현상이다. 전통기능이나 예능을 정부차원에서라도 보존하지 않으면 아무도 전승에 힘쓸 사람이 없다는 우리의 전통경시 풍조에 그 문제의 뿌리를 두고있기 때문이다.
일본에도「인간국보」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이는 우리처럼 생계비를 지원해주는 제도가 아니라 대외활동을 보조해 주는 제도라는 점이우리와 다르다. 정부에서 생계지원까지 맡아하는 우리의「인간문화재」 제도는 부끄럽게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것이다.
인간문화재란 용어는 원래 저널리즘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정확한 명칭은 아니다. 60년대 초반 현재 문하재위원인 예용해씨가 한국일보 기자로 활동할 때 기사중 이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인간 문화재의 정확한 명칭은「중요 무형문화재」다. 정부는 1962년1월 문화재 보호법을 제정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무형문화재」란 용어가 사용된다.
이에 따르면 무형문화재는「연극·음악·무용·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쉽게 풀어 말하자면 무형문화재란 정신과 육체적 활동의 걸과 이룩된, 형체가 남아있지 않은 현상들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훌륭한 음악을 연주할 때나 아름다운 춤을 출 때 나타나는 예능이나 불국사의 다보탑 및 고려청자와 같은 것을 만들 때 가하게되는 기술이나 기법은 형체가 없는 것으로서 숙달된 솜씨를 가전 사람에 의해서만 표현되고 타인에게 감흥이 전달되는 것으로 이 기·예능을 가진 사람이 죽으면 그와 동시에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단절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는 64년부터 무형 문화재를 조사·지정해오고 있다.
현재까지 정부에서 지정한 중요 무형문화재는 음악·무용 등 6개 분야에 걸쳐 94개 종목으로 생존해있는 기·예능 보유자는 모두 l백83명이다

<후보·조교도 지원>
보유자만을 지원해서는 무형문화재의 전승·보존에 차질을 가져오므로 보유자 후보·조교·이수자·전수생 등에 대한 지원도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보유자후보 91명, 조교 1백46명, 이수자 1천3명 등이 선정되어 있다.
보유자가 사망할 경우에는 보유자 후보 중에서 기·예능이 우수하고 인품과 경륜을 지닌 사람을 승격 인정하거나 또는 신규로 보유자를 발굴 인정하고 있으며 보유자대상이 없는 경우에는 보유자 후보 중심으로 공개활동 및 전수교육을 통해 그 종목이 계승되도록 하고 있다.
중요 무형문화재 47호인 국궁 기능보유자 장진섭 옹(76)은 16세부터 활을 만들기 시작한 이 분야의 최고수다.『한창때에는 1년에 백개가 넘게 활을 만들었다』는 장 옹도 이제는 기력이 떨어져 직접 만들지는 않는다.『각자 맡은 분야에서 우리 것을 지키는 것이 전통을 계승하는 지름길』이라고 장 옹은 말하고 있지만 그 어투에는 묘한 씁쓸함이 감돈다. 왜냐하면 장옹의 경우에도 그의 기능이 자신의 두 아들에 의해 겨우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각종 지원을 제공한다고는 하지만 전통 기·예능의 전승은 그리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전통예술의 살아있는 국보인 인간문화재 제도가 처한 최대의 위기는 이들의 노령화에 기인한다.
인간문화재의 평균 연령이 70세를 넘어서면서 이들의 의무사항인 후보자 전수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있기 때문이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의 인간문화재들이 많아 교육은 대개 보유자 후보나 전수조교가 맡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에 대한지원이 미약해 계승자로 나서는 젊은이들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현재 전수조교나 장학 전수생에 대한 지원금은 각각 월6만∼7만원 수준으로 그야말로「 쥐꼬리」나 다름없는 형편이다. 게다가 70세 이상 고령자중에는 직계비속이 없는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9명이나 돼 그나마 가족에 의해 전승되는 것을 기대하기도 힘든 형편이다.
문화재 전문위원인 이보형씨는 『현재 정부보조가 보유자에게 너무 큰 비중을 두고있는데 이를 보유자 후보와 전수조교 등에게 지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부문별로 인기도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계승 지원자들이 별로 없는「비인기 종목」이 인간문화재에도 존재한다는 것인데 예능부문의 경우 이미 무형문화재 기호인 시나위가 보유자가 타계한 뒤 후계자가 없어 문화재지정에서 해제됐다. 특히 이런 현상은 공예기술 부문에서 더욱 심해 아직 일부 수요가 남아있는 소목장·유기장·단청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 단절위기를 맞고 있다. 실제로 무형문화재 37호였던 화장의 경우 이미 82년에 문화재 지정에서 해제됐다.
이에 비해 가야금산조나 경기민요 등 예능부문은 일단보유자로 지정되면 높은 수입이 보장되기 때문에 지원자가 몰리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기·예능 보유자들이 자신들이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일 상설무대가 부족하다는 것도 무형 문화재 보존·전승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현재 전국에 27곳의 전수회관이 마련되어 있으나 대부분이 너무 비좁고 시설이 낙후되어 있어 전수장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못해내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서울 삼성동의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은 확장·개축을 한다고 지난 8월에 철거된 이후 예산이 확정되지 않아 언제 기공될지도 불투명한 상태다.
서울지역 무형문화재 종목들이 한곳에 모여있는 무형문화재 예술단(단장 박계순)은 『조속히 상설공연장이 신축되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무대 없어 어려움>
무형문화재 예술단이 보유하고 있는 기·예능 이수자는 모두 70명이 넘는다. 이들은 5년 이상 훈련을 쌓은 전문인들로 해당종목의 대를 이을 계승자들이지만 현재 뚜렷한 활동무대가 없어 생계조차 막연한 상태다. 판소리 등 일부 인기종목은 그럭저럭 생계유지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종목의 경우는 아예 다른 직업을 찾아 이탈하는 사람들이 속속 생긴다는 것이다.
전통문하의 전승·보존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현재의 인간문화재 제도에만 맡겨두어도 괜찮을 것인가 하는 의문은 이처럼 만만치 않다.
근본적으로 이는 전통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져야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이를 당장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어서 현재로선 민간차원에서의 보존노력이 본격화되어야 한다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문화재관리국에서 10년 넘게 무형문화재를 담당해온 서윤석씨도『행정조직의 관료적인 성격상 인간문화재 보호·육성에 융통성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고 밝히고『민간차원, 특히 대기업의 문화투자가 이 분야에 유입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운동선수들이 받는 연금에도 훨씬 못 미치는 돈을 받는 형편에 어느 누가 전통문화 계승에 앞장서겠는가』하는 어느 보유자 후보의 자조섞인 탄식은 그러므로 결코 남의 일이 아닐 것이다. <임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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