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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정규웅씨 '나혜석 평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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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최초'라는 단어는 영광과 상처의 합성어인 것 같다. 남보다 먼저 새로운 땅에 들어선 영광이 있는가 하면, 남들보다 앞섰다는 이유 하나로 오히려 냉대를 받는 상처가 있다. 문학평론가 정규웅(62)씨가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로 꼽히는 나혜석(1896~1948)의 타계 55주년을 맞아 펴낸 '나혜석 평전:내 무덤에 꽃 한 송이 꽂아주오'(중앙M&B刊)를 보면 이런 최초의 안팎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영광=1920년 4월 10일 오후 3시 서울 정동예배당에선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일본에서 최고 교육을 받은 신부 나혜석과 신랑 김우영이 백년가약을 맺은 것. 당시 동아일보에선 이 결혼식의 공개 청첩장을 게재했을 정도다. 열살 연상에 딸까지 있는 남자와 결혼한 나혜석은 결혼식 직후 그의 옛 연인이었던 소설가 최승구의 묘소를 찾아가 성묘를 했다. 2003년 현재 시점에서 판단해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상처=나혜석의 정확한 사망 일자가 확인된 때는 90년대 후반이다. 공보처가 발행한 49년 3월 14일자 관보가 발굴되면서다. 당시 관보에는 본적 미상, 주소 미상의 나혜석이 48년 12월 10일 서울 시립 자혜원에서 병사한 것으로 기록됐다. 그 전까지 그는 행려병자의 무료병동에서 사망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이다. 20~30년대 장안 최고의 '모던 걸' 가운데 한명이었던 나혜석은 그렇게 쓸쓸히 사라졌다. 그가 평소 열망했던 '자유인'으로 돌아갔다.

나혜석의 삶을 다룬 책은 전에도 몇 차례 선보인 적이 있다. 하지만 그의 자유분방한 남성관계를 부각한, 즉 흥미 본위의 책이 대부분이었다. 예컨대 많은 경우 나혜석의 삶을 1백80도 돌려버린 최린과의 관계에 집중했다. 27년 파리를 여행 중이던 나혜석은 당시 현지에서 천도교를 주도하던 최린과 뜨거운 사랑에 빠지나 결국 3년 후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저자 정규웅씨는 이런 태도를 지양하고 시대와 예술가의 관계를 파고든다. 각종 자료를 섭렵하며 나혜석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쭉 따라가되 시대와 맞설 수밖에 없었던 '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제시한다. 특히 나혜석이란 한 예술가의 내면을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하며 그려냈다.

정씨는 "세상은 나혜석을 외면했다. 외면만 한 것이 아니라 질시하고 냉소했다. 당대의 폐쇄적 사회 구조가, 뒤틀린 의식 구조가 그를 파멸로 몰아넣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폐쇄적 사회 구조란 무엇일까. 그것은 유교의 전통이 강하게 살아남았던 일제 시대의 남존여비 사상, 가부장 중심 사회다. 그런 시대에서 자유연애를 주장하고, 남녀평등을 생각했던 신여성이 마음놓고 살아가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비슷했을 것이다.

나혜석이 낭떠러지로 떨어진 건 남편 김우영과 이혼한 30년대 이후다. 문학.그림 모두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던 그는 '이혼'이란 딱지 하나에 예전의 명성을 일시에 잃게 된다. 당시 대단한 화제를 모았던 '이혼고백장'을 발표하고, 재기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음에도 돌아온 건 냉소와 질시가 전부였다.

'자화상''스페인 풍경''누드' 등의 회화, '경희''정순' 등의 소설을 남긴 천재적 작가, 또 3.1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5개월의 옥고를 치른 민족주의자 나혜석은 불륜이란 한 단어에 막혀 완전히 평가절하됐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 합니다."(1934년 '이혼고백장' 중에서)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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