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능력 안 따지고 노후생활비 주는 노령연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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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03면

서울 강서구 화곡동 박모(73) 할머니는 폐지를 모아 하루에 3000~5000원을 번다. 백내장을 앓고 있지만 거의 매일 폐지 수집에 나선다. 이 벌이로는 생활비와 약값을 댈 수가 없다. 동사무소에서 알선한 후원금(월 28만원)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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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삶을 보면 기초생활보장 대상자가 진작 됐어야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원하지 않았다. 대상자가 되려면 자식의 살림살이를 드러내야 하는데 박 할머니는 지방에 사는 아들(51)에게 폐가 될 것을 우려해 곤궁한 삶을 택했다. 신청하더라도 아들의 소득 때문에 탈락할 가능성이 크다.

할머니의 사정을 잘 아는 서울 강서노인종합복지관 박훈 사회복지사는 “아들과 왕래가 없고 부양을 못 받는 데도 국가 보조를 못 받는 게 안타깝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같은 이유로 경로연금(월 5만원)도 받지 못한다.

우리의 복지제도에는 자식의 부양의무가 강하게 담겨 있다. 그랜저를 타고 다니는, 잘사는 자식을 둔 부모에게까지 국민 세금으로 생계비를 줄 수 없다는 취지에서다. 자식이 금융자산 조회에 동의해야 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대상에서 제외한다. 기초생활보장제ㆍ경로연금제가 그렇다. 기초생활수급자 바로 위 저소득층인 ‘차상위계층’ 의료비와 장애수당도 마찬가지다.

2000년 기초생활보장제를 도입할 때 생활이 어려운 부모에게 먼저 생계비를 지급하고 나중에 자식에게 돌려받는 구상권 조항을 넣었다. 2001년에는 평택시가 19명의 ‘불효 자식’에게 이를 처음으로 적용했다.

인천 연수구는 지난해 7월 기초수급자 할머니(80)의 50대 아들(충북 거주)에게 구상권을 행사했고 아들이 응하지 않자 지난해 말 부동산을 압류했다. 독촉 전화를 해도 계속 응하지 않고 있다. 올해는 7명에게 구상권을 행사했다. 이 구청의 이규보 생활의료보장팀장은 “구상권을 행사하면 비용을 잘 내는 사람도 있고 기초수급자 신청을 철회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고득영 기초노령연금 총괄팀장은 “기초노령연금은 이름만 연금일 뿐, 저소득층의 소득을 보전해주는 공공 부조제도이기 때문에 자식의 부양능력을 따지지 않는 것은 상당한 변화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교육비나 비싼 주거비 때문에 자식의 삶이 점점 어려워지므로 부모 부양책임을 사회가 떠안았다는 점을 후하게 평가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정경희 고령사회정책팀장은 “우리도 서구처럼 개인이 노후를 준비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고 가족의 부양을 당연하게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울산대 전성표(사회학) 교수는 “전통사회에서는 ‘이웃의 눈’이 부모 부양을 강제했지만 요즘은 그런 게 전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자식의 경제력을 따지지 않는 게 맞다”고 말했다.

선진국은 자녀에게 부양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스웨덴 등 북유럽과 미국이 대표적이다. 다만 미국은 아동에게 수당을 줄 때 부모의 부양능력을 따진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자녀의 경제력을 체크하지만 엄격히 적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보다 부양의무자 기준이 더 강하다. 형제까지 따진다.

이번 제도의 변화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서울 강서구 화곡5동사무소 박은희 사회복지사는 “국민 정서상 자식의 부양의무를 무시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보건사회연구원 김미곤 사회보장연구본부장은 “기초노령연금 대상자가 되려면 소득과 재산이 일정기준 이하여야 하는데 이 기준을 맞추기 위해 부모가 자식에게 증여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초생활보장제의 부양의무 조항은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조흥식 교수는 “효라는 미풍양속을 계속 살리고 국가의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당분간 부양의무 조항을 유지해야 한다”면서 “10~15년 뒤(저출산 효과가 나타나) 자식 수가 줄고 살림이 어려워지면 그때 가서 없애도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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