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북카페] "책 둘 자리 모자라 조교도 안 둬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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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대학생 때는 평범했어요. 남들처럼 많이 놀기도 했고…." 이 사람 수상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정민(47) 한양대 국문과교수의 말이라 쉬 믿기지 않는다. 1996년 '한시미학산책'(솔)을 시작으로 10년새 30권 가까운 책을 쓴다는 것이 범상한 일인가.

"외국어 공부하듯 매달리기는 했지만 한문을 따로 배우지는 않았어요. 운이 좋았죠. 90년 '조선후기 고문론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뒤 91년 모교의 전임강사 자리를 땄으니까요."

갈수록 궁금하다. 해마다 2권 이상의 책을 내는 저력의 원천도 그렇고 과연 운만으로 가능했는지.

연구실을 둘러보니 일단 한 가지 의문은 풀린다. 창가에 놓인 책상을 빼고는 3면 벽이 책으로 빼곡하다. 책꽂이는 겹으로 되어있고 방 중간에도 책장이 떡하니 자리잡았다.

"연구실을 리모델링할 때 책을 옮기려니 270 박스가 되더라고요. 한 5000권 정도 될까요. 책 둘 공간이 모자라 조교도 두지 않았어요."

많기만 한 게 아니다. '담배와 문명' '그림으로 보는 세계 상징어사전' '이야기 식물도감' 등 언뜻 어울려 보이지 않는 책도 수두룩하다. 그래도 매달 20만원 정도 책을 구입한단다. 박사과정 중이던 88년, 이제는 한시 연구자들의 바이블이 된 '한국역대시화유편'(아세아문화사)을 엮은 것도 이런 자료수집벽이 바탕이 됐다.

메모벽과 집중력은 그의 또다른 힘이다.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주제를 발견하면 메모를 하고, 관련 문헌을 찾아 파일을 만든다. 그것을 이제는 '정 교수의 씨앗창고'로 유명해진 의료용 차트보관대에 꽂아두고는 계속 보완한다. 거기 꽂힌 저술계획서가 지금 100종이 넘는다.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생각을 익히다가 감이 오면 뿌리를 뽑는단다. 연구의 질뿐 아니라 절대량이 상상을 뛰어넘는다. 토일요일도 연구실 출근은 예사고 골프나 스키는 손도 대지 않았다.

지난해 동다기(東茶記)란 우리 고유 차에 관한 전적을 발굴한 것을 계기로 요즘 다도에 관한 연구를 하지만 양의 털로 만든 붓 양호필(羊毫筆),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 지두화(指頭畵)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식이다.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 방학 중인데도 우리 차에 관해 쓴 개인문집을 구해 보고 있었다.

그러니 일단 매달리면 다른 분야 전문가들도 감탄하는 성과가 나온다. 시론이 그랬고 화론(畵論)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시미학산책'의 경우 이름난 시인들도 "시를 배우는 데 이만한 책이 없다"고 평했을 정도다.

전문가들만이 아니다. 그의 문장은 한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나 탄탄한 독자층을 만들어냈다. 전통문장론으로 학위를 딴 그가 글에 기울이는 정성은 여간 아니다.

"글을 쓴 뒤 소리 내어 읽어보죠. 때로는 아내가 읽어주기도 하는데 읽다가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글의 결이 이상한 겁니다. 그렇게 해서 너댓 번 글을 고칩니다."

조선 지식인의 내면을 다룬 '미쳐야 미친다'(푸른역사)에서 도교 미학을 분석한 '초월의 상상'(휴머니스트), 그림의 문화적 의미를 천착한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효형출판), 다산 정약용의 저술법을 담은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김영사)까지 전문가와 일반 독자들이 두루 만족하는 책들을 쏟아낸 배경이 이해가 간다.

"다작이 아니라 태작이 문제죠."

안식년을 맞거나 하면 저서가 한꺼번에 출간되는 걸 보고 그를 아끼는 일부에서'조기 소진'을 우려하는 걸 의식한 설명이었다. 평소 충분한 연구를 축적해 둔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정 교수는 지금도 2년이나 묵은 것을 포함해 때를 기다리는 원고가 여럿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제자들과 더불어 '아버지의 편지' '유언' 등을 소재로 한 서너권의 책을 준비 중이란다. 출판계에서는 그의 글을 받으려 줄을 서고 있으니 가을쯤이면 독자들은 다시 그가 차린 '한문학의 향연'을 맛볼 수 있을 듯했다.

글=김성희 기자 <jaejae@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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