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받는 「중립」… 현 총리 고심/타성젖은 관료조직에 불안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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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편파수사” 민주·국민당서 파상공세/의지대로 안되는 「현실의 벽」 느낀듯
정부의 중립의지에 관한한 자신만만하기만 했던 현승종국무총리가 최근들어 다소 조심스러워진 인상이 역력하다.
현 총리는 그동안 정부의 중립의지를 의심하는 민주·국민당의 항의방문단이 찾아오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거나 『잘 알겠다』는 정도로 묵살해왔다.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고 짜증스러워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정부의 중립의지를 정략적 목적으로 음해하려들지 말라고 화를 냈던 것이다. 굳이 변명하거나 해명할 필요를 못느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7일 오후 민주당의원들이 찾아와 항의하자 비교적 장문의 준비된 답변을 해주는 인내심을 보였다. 이날 오전의 간부회의에서는 듣기에 따라 묘한 느낌을 담고 있는 지시도 내놓았다. 현대그룹과 국민당에 대한 수사가 편파적인 것이 아니냐는 문제에 대해 지난 주말내내 심사숙고했으나 『나자신 전혀 양심의 가책받을 일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총리가 스스로 편파수사를 지시한 바 없지만 현재 진행되는 수사상황이 불편부당했다고 강변하기에는 어딘지 석연찮게 느껴진다는,불쾌감표시를 자제한 듯한 분위기가 없지 않다.
실제로 현 총리는 민자당의 사조직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가 발주한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03시계에 대한 경찰의 늑장수사·현대임직원들에 대한 24시간 미행에 대한 언론보도와 관련,사실확인을 지시하면서 앞으로 편파수사라는 잡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특별히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민주당의원들이 찾아와 항의한 대목들에 대해 일부 인정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현 총리는 취임후 기회있을 때마다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국민뿐이라는 말을 해왔다. 자신이 한번도 몸담지 않았던 관료조직이 자신에게 결코 우호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염려의 표시이기도 하다. 요컨대 최근 현 총리가 조심스러워졌다면 그것은 내각과 자신의 중립의지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의지만 갖고는 해결될 수 없는 현실의 두께 때문이라 해석된다.
대통령선거일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되고 김복동의원의 탈당파동을 겪으면서 그는 조금쯤 자신의 역할이 무엇일까 회의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타성에 젖은 관료조직은 정말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는 것일까,관료조직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인가,일부 고위공직자들이 정권이양기의 보신을 위해 나모르게 줄서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현 총리도 인간이다. 그런 불안감이 없을리 없다. 그러나 공명선거 관리의 책임을 떠맡고 있는 그로서는 자신의 수족이 저지른 「실수들」에 이런 의심을 드러내기도 어려운 처지다.
현 총리는 이제부터 진짜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현 총리는 외롭다. 민주·국민당이 시비를 걸어오는 것은 차치하고 민자당도 현대문제와 관련,표가 떨어진다고 투덜거리고 있다. 청와대는 중립내각에 모든 것을 떠맡기고 팔짱만 끼고 있다』고 총리의 최근 심경을 귀띔했다.
이에 반해 민주당 김대중후보는 7일 오전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의 중립성에 직접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작금의 사태로 대통령의 중립성에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되었으며,이는 매우 우려할만한 사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중립성시비는 노태우대통령을 겨냥한 것이지 현 총리를 겨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김대중후보는 노 대통령에게 대해서는 『중립성이 흔들리고 있다』『잘못된 대통령의 처신때문』이라고 비난했다. 김 의원 사건과 최근 국민당이 발표한 안기부의 민자당 지원설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현 총리에 대해서는 『총리는 사실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둘러싼 공무원들의 농간에 의해 진의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며 옹호주장을 했다. 총리가 잘못된 보고속에서 사태를 직시하지 못해 본의아니게 편파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이다.
내각의 중립성에 가장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최근 현대에 대한 수사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국민당이다.
정주영후보가 자신은 『대통령과 장관들의 중립의지는 변함이 없는데 그 밑의 관리들이 김영삼후보를 당선시키면 좋은 벼슬자리를 할까봐 과잉충성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대권후보로서의 점잖은 표현이다. 실제로 당직자들은 『애초부터 9·18중립선언은 엉터리』라고 혹평한다. 심지어 『현승종총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밑의 사람들이 보고하는 것만 믿고 국민당과 현대를 탄압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국민당이 중립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근거는 수사가 편파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민자당에 비해 편파적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현대를 수사하면서 왜 같은 사조직인 민자당의 민주산악회·나라사랑본부는 수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현대가 국민당에 제공한 비자금,곧 정치자금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어차피 정치자금은 기업 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관례고,민자당도 기업 등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쓰고 있지 않느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막상 국민당은 내각총사퇴 주장은 유보하고 있다. 일단 현상황에서 「성급하다」는 판단이다. 설혹 내각총사퇴를 주장하려 하더라도 지금은 이르다는 전술적 배려도 있다. 어차피 지금 관권개입을 문제삼는다는 것은 대선말미까지 이슈로 끌고가야 한다는 의미이기에 조금씩 공세의 강도를 높여가자면 이번 주말께 내각총사퇴 주장을 내놓는게 시기적으로 맞다는 얘기다.<이재학·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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