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내일은 굶자는 세금깎기 공약/최철주 본사논설위원(유세현장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정치인이 선거 유세에서 몇년후 우리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누구나 오늘 생명이 끝나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런데 유독 충남 유세에서는 각 후보들이 미래를 모두 지워버리고 현재만을 이야기하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숫제 까놓고 이야기 하자면 정부가 거둬들인 세금은 농민을 위해 모두 써버리겠다는 투다. 오늘 남은 빵은 다 나눠 먹고 내일은 굶자는 것이다.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설명하지도 않는다.
대통령후보들이 왜들 이런 약속들을 굳세게 다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니 결국은 충남의 부동표가 엄청나기 때문인 것 같다. 마음들이 다급해져 이제는 유권자에게 뭐든지 해주어야겠다는 심산이다.
충남 유세장에서 유권자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란 참으로 어렵다. 정주영국민당후보가 지나간 자리에서건,방금 유세를 끝낸 김대중민주당후보에 대해서건 의견을 물어보면 그저 「글쎄유」다. 천안에서 공주로 들어가는 1시간 남짓 버스 길은 광덕마을 근처의 몇몇 후보자 현수막이 없었더라면 그나마 대통령선거 분위기를 감지하기가 어려울만큼 냉랭하다. 유권자들의 관심 표명이 아직도 미적지근하다고 보았는지 각 후보들은 공약 가지수만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주민들의 반응은 매우 복잡하다. 민자당 김영삼후보가 부여국민학교에서 유세할 때에도 50대의 한 청중은 김종필대표에 대한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 분이 여기를 어떻게 와유. 차라리 안오는게 낫지유』 김종필씨에 대한 지지세력의 퇴조가 김 후보의 득표전략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가늠하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20대의 다른 유권자도 주민들의 숙원사업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정당의 인기를 재는 수 밖에 없다는 견해다. 타도출신 대통령들의 「충청도 푸대접」인식이 반양김 정서로 이어져 이 일대의 표는 럭비볼 튀는 방향을 예측하기 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부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공략에 나선 양김씨는 농민들의 표를 소득보상책으로 유인하고 있다.
민주당의 김대중후보는 예산시장에서 가진 유세를 통해 농지세도 완전히 없애고 수세도 내지 않도록 하겠으며 그 위에 농어촌 부채를 전액 탕감하는 등 「부채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말썽 많은 농업진흥지역의 재조정까지 약속했다. 농가부채 10조여원을 정부재정에서 갚아주겠다는 그의 부연설명에도 불구하고 청중의 박수가 큰 파도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쓰다 달다 감정표현을 자제하는 충청도인들 기질 때문일까.
김영삼후보는 유권자들에게 6공정부의 농정실패를 비판하면서 농지거래 규제완화와 농어촌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관련법 제정 등을 언급했으나 그런 제도가 장차 농민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를 좀더 소상히 이야기할 수 있어야 했다.
『11월말에 정주영후보가 여기와서는 아이들 다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해주고 아파트도 반값에 분양해준다고 약속합니다. 그것이 비록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믿어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경상도 사람은 이제 기대할 것 없습니다. 전라도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이웃덕이라도 볼 수 있지요.』
충남농민들이 지금까지의 정부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고 아직도 지역차별에 희생되고 있음을 내비치는 것은 정치인들의 자업자득이다. 과거에도 많은 공약을 내걸었으나 신의를 가지고 지킨 사람은 없었다고 투덜댄다.
지금 선거유세에서도 각 후보들은 똑같은 장소에 마련된 연설무대에서 서서 다른 후보의 말은 조금도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빠짐없이 충남도민을 칭찬하는 말이 「충절과 예절의 고향」이었고,자신이 내놓은 공약은 성실히 실현할 것임을 믿어달라고 했다.
시장 개방속도가 빨라질수록 농가소득을 일정 수준이상 올릴 수 있는 농정개혁을 어떻게 진행시킬 것인가를 미리 그려놓지 않고서는 백약이 무효다. 지금 이 시기에 농민 세금없애고 부채를 완전히 떨어버린다고 해서 장차 소득이 계속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흉어기 어부에게 생선을 던져주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고기잡는 기술을 터득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국민의 세금은 농어촌의 활력을 되살리는 구조조정사업에 써야할 것 같다.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각당 후보들이 세금 깎아주는 경쟁에 들어감으로써 경제문제는 심각한 효율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부동표가 많은 지역일수록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어느 당의 후보건 대통령이 된 다음에 그 엄청난 유권자의 기대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범상한 지식만으로는 납득할 길이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