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 확인도 않고 인수/블랙박스 「망신살」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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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러 교섭과정 의사소통 허점/성과에만 급급… 외교미숙 노출
KAL007기의 블랙박스를 둘러싼 논란은 한·러 양국정부의 미숙한 일처리에 따른 소동으로 밝혀졌다. 양국 정부간 기대차가 다른 상태에서 의사소통이 불충분해 오해와 불신을 일으킨 것이다.
페트로프 러시아대통령실 행정실장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시했다.
러시아측은 옐친대통령의 방한직전까지도 무엇을 전달할 것인지에 대해 확인해주지 않았었다. 다만 옐친대통령이 노태우대통령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방한계획을 다시 밝히며 「블랙박스 테이프들」을 전달하겠다고 밝힌 것이 전부였다.
옐친대통령은 방한직전 모스크바에서 가진 한국특파원들과의 회견에서 『FDR는 한국에 넘길 수도 있지만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넘겨 공정한 조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이미 언명한 바 있다.
러시아정부는 한국에 전달할 물건이 무엇인지 확인해주지 않았지만 옐친대통령이 방한한 지난달 18일 저녁에는 이미 불랙박스를 가져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신중함을 잃고 정부는 이것이 「블랙박스 일체」라고만 믿고 내용물에 대한 리스트인수 등 정확한 확인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외무부관리가 19일 오전 러시아관리들이 18일 도착직후 블랙박스를 가져왔다고 밝혔다고 확인했었음에도 이제와서 당국자가 『정상회담에서 전달할 때까지 몰랐다』고 거짓증언하고 있는 것도 이 부분에 대한 책임회피로 해석된다. 아니면 이 과정에서 누군가가 「공적」을 돋보이게 하려고 내용물에 관한 정확한 지식없이 과장보고했을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측이 블랙박스를 전달하면서도 그 내용물을 밝히지 않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것은 고의적으로 한국정부를 기만하지 않았느냐는 추측과 함께 여론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대목이다. 그렇지만 러시아측이 전달한 블랙박스는 전달받은 당일로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몇시간을 속이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러시아측에 대한 91년도 소비재 차관 미집행분 3억3천만달러에 대해서는 블랙박스와 관계없이 사전에 재개약속이 이루어져 있었고,나머지 12억달러분은 앞으로 양국정부간에 협의해나가야 한다. 따라서 이를 위해 속임수를 썼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된다. 다만 당시 한국측의 기대감을 생각한다면 러시아측의 「미필적 고의」는 인정할 수 있다.
한국정부는 19일 블랙박스를 전달받고 즉시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은채 크게 떠들어왔고 21일에야 청와대에서 교통부로 인계했다. 또 교통부는 주말을 넘겨 23일에야 이를 개봉,FDR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국정부는 그 내용물보다 19일 인수식을 하는 「깜짝쇼」에 더 관심이 쏠렸던 것이다. 19일 전달직후 청와대측은 옐친대통령이 「블랙박스 본체와 테이프 네개」를 전달했다고 발표했다. 테이프의 내용에 대해서는 『옐친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 아직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그런데도 당시 청와대측이나 언론은 지레 짐작으로 FDR와 CVR 등 일체가 전달된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보도했다. 이번 사건과정에서 한국정부는 외형적 성과에 급급하다는 외교행태를 노출해 국제망신을 당한 꼴이 됐다. 블랙박스 사건은 이런 관점에서 좋은 교훈을 남긴 셈이다.
한편 교통부는 러시아측이 비행경로기록장치 테이프를 제외하고 블랙박스를 한국측에 넘겨준 것이나 미국·일본을 포함,관련 5개국 회의에서 원본테이프를 내놓겠다는 것은 항공사고조사의 국제관례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항공기사고조사규정(협약 부속서 13권)에도 어긋난다는 입장이다.
국제민간항공기구 협약에는 항공기 사고조사는 발생지국가에서 주도할 수 있으나 조사의 주도권을 사고항공기 등록국가에 위임할 수 있고 발생지국가가 주도권을 행사하더라도 등록국가가 참여할 수 있도록 돼있어 관련국가 모두를 조사에 참여시킨다는 것은 필요에 따라 조사 주도국가와 등록국가간의 합의에 의해야 하는 것이 국제관례라는 것이다.<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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