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도 제대로 없는 유세장/박의준 특별취재반(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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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달 30일 오후 조선조 고종과 순종의 묘를 모신 경기도 미금시 홍유릉앞 광장에는 볼썽사나운 일이 하나 벌어졌다.
모후보 유세장인 이곳에 나온 많은 남자 청중들이 화장실을 찾지 못하자 부끄러움도 잊은채 등만 돌리고선 여기저기 서서 볼일(?)을 본 것이다. 때문에 홍유릉앞 광장 구석구석은 순식간에 거대한 「옥외화장실」로 돌변했다.
물론 홍유릉앞 광장에는 왕릉 입구답게 고풍스럽고 꽤 커보이는 화장실이 한군데 있었다.
그러나 이 화장실은 출입문 바로 위쪽에 『월동기간중 폐쇄하오니 부근에 있는 간이화장실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는 안내문만 덜렁 걸린채 자물통이 굳게 채워져 있었다.
안내문에 써붙인대로 화장실에서 약 5m 떨어진 곳에 간이화장실이 한칸 있긴 했으나 여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러니 남자들의 화장실은 자연스럽게 후미진 풀숲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같은 「화장실난」은 비단 이 유세장에서만 생겨난 것은 아니다. 전국 어느 유세장에서든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난달 26일 모후보의 유세가 열렸던 경남 거창국민학교에선 통로형식으로 된 남자용 화장실이 넘쳐흐를 지경에 이르자 일부 유권자들은 아예 학교 담벼락에다 실례(?)하기도 했다.
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화장실의 「큰일」 보는 곳 세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예 사용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놓았다. 같은날 남원에서 열린 모후보 유세장(관광단지)에서도 주변 숲은 순식간에 화장실로 변했다.
이같은 일이 빚어진데는 청중들의 시민의식이 실종된 탓도 있지만 정부당국·정당의 무성의와 잘못 또한 적지않다.
당국은 기존 화장실을 관리에 다소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유권자들에게 개방,불편을 덜어줬어야 했다. 당국과 각 정당은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들게 뻔한 유세장에 간이화장실 몇개쯤은 설치했어야 옳다. 예산이 바닥난 딱한 사정이라면 다른 장소에 설치된 간이화장실을 잠시 옮겨오면 될 일이다.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언제까지 이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할 것인가. 공정선거를 주창하는 정부는 후보들의 경호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유권자들이 편안한 분위기속에서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세세한 곳까지 신경써야 한다.<미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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