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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수상에 걸맞은 완성도|조병화·김명수·김명인·장석남의 시들|김재홍<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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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15면

한해 문단은 신춘문예 발표로 장이 서고, 이러 저러한 문학상 발표로 막을 내린다고 하겠다. 올해도 대한민국문학상·만해 문학상·소월 문학상·김수영 문학상이 발표·시상되고 각 문예지들이 그 특집을 마련하고 있어 한해가 기울고 있음을 말해 준다.
대한민국문학상 본 상의 영예는 조병화씨의『타향에 핀 작은 들꽃』에 돌아갔다. 이 시집은 모두 59편의 미발표 신작 시로 쓰여진 것으로 연작 장시의 성격을 지닌다.「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내가 너를 사랑한다 한들/어찌 내가 그 말을 하겠니/구름으로 지나가는 이 세월/너는 이승에 핀 작은 들꽃이로구나/하늘의 별이 곱다 한들/어찌 너처럼 따스하리」로 시작되는 이 연작 장 시집은 작은 들꽃 하나에서 영원과 우주를 보며 인간과 자연, 생명과 사랑, 고독과 허무를 집중적으로 노래한다. 한 원로시인이 죽음 길들이기를 통해 한 생애에 걸친 인생관과 세계인식을 집약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만해 문학상은 중견시인 김명수씨의『침엽수지대』에 돌아갔다. 일제 강점기 혹독한 추위와 어둠 속에서 민족혼의 등불을 높이 치켜들었던 만 해의 시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이상은 그간 시의 실천성을 강조하는 시인들에게 주어졌다. 이번에도 선정의 준거 틀은 그대로 유지됐지만 수상작은 서정성이 빼어나다는 점에서 관심을 환기한다.
「너, 희디희고 우아한 날개를 저어/고니야, 이 호수에 날아왔구나/사람이 죽어/그 혼령도 훨훨/저승으로 날개 저어 날아간다면/너의 날갯짓을 닮으랴/갈대는 메마르고/찬 얼음도 깔리는 이곳」(『송지호고니』부분, 창작과 비평 겨울호)과 같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서정이 아름다운 무늬 결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할 매는 부엌에서 아궁이의 재를 헤쳐/잉걸 불을 꺼내/가랑잎에 넣어 불어/불을 일궜다/오늘은 가슴에 불씨를 묻어 두는 사람들 많다」(『불씨』)처럼 맵고 뜨거운 정신의 불씨를 간직함으로써 삶의 서정이 예술성으로 고양되는 한 시범을 보여준다.
올해 김달진 문학상수상자이며 다시 소월 문학상 수상자가 된 김명인씨의 시들도 주목을 환기한다.
「길섶 풀물에 든/낡은 경소리 한 구절 내내 떨쳐 버리지 못해/시큰대는 발자국마다 마음 질척거리는데/화엄은 화음 속에 얼굴 감추고 하루종일/굴참나무 가지에 얹히는 경전을 들어/나를 후려친다」(『화엄에 오르다』, 문학사상 12월 호)에서 보듯 시적 사유의 내밀함과 상상력의 힘이 깊이 있게 결합돼 서정적 긴장 력을 제고시키고 있는 것이다.
삶과 사물의 깊이 속에 자리잡고 있는 허적 감을 묘파하는 형상 력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첫 시집『새떼들에게로의 망명』으로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신예 장석남 시인의 신 서정 또한 주목에 값한다.「저 입술을 깨물며 빛나는 별/새벽거리를 스미는 저별/녹아 마음에 스미다가/파르륵 떨리면/나는 이미 감옥을 한채 삼켰구나/유일한 문밖인 저별」(『별의 감옥』전문, 세계의 문학 겨울호)과 같이 순결하고 신선한 서정적 감응 력이 신세대 서정의 새로운 가능성을 예견케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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