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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인기 드라마 주인공들 가상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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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화두는 가족이다. 아니, 가족 해체다. 아무도 그 절대적인 가치에 도전하지 않았던 가족이 위기를 맞은 것이다. 결혼이라는 법적 절차 없이 남녀가 한방을 쓰는 혼전 동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고, 바람의 희생자로만 여겨졌던 여성이 바람의 주체로 전면에 나섰다. 미혼모는 호주제라는 틀에 갇혀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에도 버겁다.

게다가 올해는 유난히 부모가 자기 편의대로 제 자식을 무슨 물건처럼 아파트 아래로, 강물로 던져버리지 않았는가. 이런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가상대담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돌아봤다.

◇정은(정다빈.'옥탑방 고양이')=다들 쉬쉬 하는 젊은 남녀의 혼전 동거를 드러내놓고 얘기했다고 해서 나를 무슨 혼전 동거 대변인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은 아니야. 하룻밤 실수로 경민(김래원)이랑 내 옥탑방에서 동거 시작한 거 다들 알잖아. 나도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면 하고 늘 생각하는 걸.

◇애경(변정수.'앞집 여자')=그래도 넌 그날 밤 일 갖고 책임지라면서 경민이 발목 잡지 않았잖아, 오히려 부담 갖지 말고 옥탑방에 있으라고 했지. 경민이가 다른 여자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정은=나도 여잔데 솔직히 기분이 좋을 리는 없죠. 사실 남녀 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다음날 경민이가 아무 말 없이 그냥 사라져 너무 괘씸했다고요. 하지만 하룻밤 같이 보냈다고 책임지라고 할 수 없잖아.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게다가 다 큰 성인들인데 한번 선을 넘었다고 한들 그게 뭐 대단한 거예요?

◇영준(조민기.'노란 손수건')=그건 정은씨가 모르는 말이에요. 만약 덜컥 아이를 가졌는데 그 사람이 떠나버리면 어떡해요. 아이를 낳는 것도 힘든 결정이지만, 미혼모가 된 다음에 정은씨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한 가정을 이루려고 해도 그 과거가 항상 걸림돌이 될 걸요.

◇정은=나를 이해하고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되겠다는 사람이랑 결혼하면 그만이지 과거가 무슨 상관이야.

◇영준=나도 그런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자영(이태란)씨와 결혼을 준비하면서 처음 알았어요. 지민이는 자영이가 혼자 낳아 기른 아인데 우리가 결혼하면 당연히 내 아이가 돼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결혼해도 지민인 내 아들이 안된다는 거예요. 지민이가 뱃속에 있을 때 버린 친부가 아니면 아무런 권리가 없대요.

◇은교(장서희.'회전목마')=그깟 성(姓)이 무슨 소용이야. 부모가 키우기 버겁다고 자기 자식을 차가운 겨울 강물 속에 던지는 세상인데. 올해 7월 이후에만 23명이나 되는 어린 생명이 부모의 손에 이 세상을 떠났다구. 누구 성을 따르느냐보다 어떻게 키우느냐가 중요한 거 아니야.

◇영준=맞아요. 법적인 부모까지 되면 좋겠지만, 날더러 지민이의 법적인 아빠되는 것과 평생 지민이랑 사는 것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난 지민이랑 사는 걸 택할 거예요.

◇은교=지민이가 부러워요. 비록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끝까지 지켜주겠다는 가족이 있으니까. 난 어릴 때부터 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어요. 유약한 우리 엄마.아빠가 생활고를 비관해 다 같이 죽겠다고 얘기했을 때 정말 무서웠다고요. 물론 아빠가 재혼한다기에 진교(수애)를 데리고 절벽에 가서 같이 죽자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었어요. 난 정말 살고 싶었다고요. 아빠가 죽었다는데도 수능시험 다 보고 나왔다고 다들 나더러 독종이라지만 난 그저 아빠의 죽음을 믿을 수가, 아니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영준=은교씨 맘 이해해요. 어린 나이에 겪은 엄마의 자살도 큰 충격인데,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죠. 엄마가 죽은 줄 알고 ' 진교랑 나도 데리고 죽을 거잖아'라고 울부짖으면서 아빠한테서 도망쳤던 것과 같은 심리였겠죠.

◇애경=그러니까 허울뿐인 가정을 움켜쥐고 위선 떨다가 다 같이 절벽에서 떨어지느니 현실적으로 사는 게 더 나은 것 같아. 남편한테 불만 있다고, 왜 우리 가정은 이것밖에 안되느냐고, 거기에 매달려서 불행하게 사느니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야 한다는 얘기지. 그게 결국 가정을 위해서도 더 좋은 일 아니겠어?

◇정은=그러니까…바람…을 말하는 거예요?

◇애경=그래. 날 봐. 끊임없이 남편 아닌 다른 상대와 연애를 하지만 난 가정에 피해준 거 없어. 오히려 자신있고 행복한 주부가 돼 준 것뿐이라고. 이건 내 인생이야. 바람은 일종의 생활의 활력소야. 아무한테도 피해 안 주고 혼자 누리는 생활의 활력소!

◇영준=애경씨가 아무리 그렇게 얘기해도 진심이 아니란 걸 알아요. 애경씨도 결국 남편과 아이 데리고 시골 펜션으로 떠났잖아요. 활력소들을 뒤로 하고.

그리고 그런 후에야 진정한 행복을 찾았잖아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하죠.

난 내가 수퍼맨이었으면 좋겠어요. 아내와 아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든든하게 막아줄 수 있도록요. 유치하죠. 하지만 바로 그런 게 가족의 사랑 아닐까요.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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