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측 "37쪽짜리 대운하 보고서는 위조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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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이명박 경선 후보의 대표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의 타당성을 낮게 평가한 '대운하 보고서'의 위.변조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건설교통부가 수자원공사 등 세 개 정부기관의 TF(태스크포스)로부터 받았다는 9쪽짜리 보고서와 정치권에 떠도는 37쪽짜리 보고서의 연관성이다.

이번 논란은 이용섭 건교부 장관이 18일 국회 건교위에 출석해 "내가 보고받은 것은 9쪽뿐"이라며 "37쪽짜리는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불거졌다. 이 때문에 나머지 20여 쪽의 출처를 둘러싸고 이 후보 측은 "정부(건교부) 보고서에 누군가 대운하 건설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대거 담는 위.변조를 했다"며 "조직적인 '이명박 죽이기'의 증거가 드러났다"고 공세를 취했다.

특히 이 후보 캠프 박희태 선거대책위원장은 19일 오전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공작의 정점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있다고 본다"며 보고서와 관련해 청와대에 의심을 표시했다. 캠프는 이런 주장의 근거로 "VIP께서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만찬(2월 22일)에서 '운하가 우리 현실에 맞느냐'고 말씀하셨다"고 한 보고서의 구절을 꼽았다. 'VIP'는 정부기관에서 대통령을 비공식적으로 칭할 때 쓰는 호칭이기 때문이다. 이 후보 측은 건교위 소속 한나라당 의원들을 과천 건교부로 급파해 진상 규명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 후보 측의 공세에도 건교부는 9쪽짜리 보고서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이날 오후 국무회의에서 자료의 제출을 지시하자 오후 9시가 넘어 국회 건교위원장에게 제출하는 형식을 빌려 보고서를 공개했다. 건교부는 보고서와 함께 보낸 경위서에서 "불필요한 논란이 확산되고 있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요청하고 있어 보고서를 제출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9쪽짜리 보고서를 공개함으로써 37쪽짜리 보고서와 무관함을 증명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보고서 공개로 의혹은 더욱 증폭됐다.

전날 이 장관이 국회에서 한 증언과 공개된 보고서의 내용에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건교부가 국회에 제출한 9쪽짜리 보고서는 37쪽짜리와 내용과 형식이 거의 같은 판박이였다.

표지의 작성자란이 'TF'가 아닌 '(건교부)수자원기획관실'로 바뀌었을 뿐 37쪽짜리 보고서의 앞 부분 9쪽과 거의 일치했다. 'VIP' 관련 내용도 똑같이 포함돼 있었다. 다만 대운하 건설 비용을 18조원(37쪽짜리는 17조원)으로 책정한 점 등에서 사소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이 전 장관이 전날 국회에서 한 "보고받은 보고서는 (37쪽짜리 보고서와) 내용과 글자체부터 많이 다르다" "공식문서에선 ('VIP'란 용어 대신) '대통령님'이라고 쓴다" "대운하뿐 아니라 다른 현안들과 함께 보고됐다" 등의 증언은 모두 위증 논란에 휩싸였다. 문제가 된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돼 있는 건교부 수자원기획관은 보고서 공개 이후 여러 차례 연락을 취했으나 닿지 않았다.

결국 이 장관이 받은 것이라며 건교부가 제시한 보고서가 이 장관의 하루 전 발언을 뒤집은 셈이다.

이 후보 측에서는 당장 "9쪽짜리 보고서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장관이 보고받았다고 어제(18일) 국회에서 했던 얘기와 공개된 문서가 너무 달라 오히려 문제의 37쪽짜리 보고서의 출처를 숨기기 위해 새로운 요약본을 만든 게 아니냐"는 주장이다.

캠프 박형준 대변인은 "9쪽짜리 문서가 새롭게 작성된 것이든 아니든 37쪽짜리 '이명박 죽이기' 문건과의 상관성을 숨길 수 없게 됐다"며 "청와대가 나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처럼 정치권의 논란이 거세지자 중앙선관위도 이 보고서의 작성과 유출 경위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선관위 관계자는 "어떤 목적으로 보고서가 작성됐는지, 이 과정에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를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정치권에서 대운하 보고서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어 자체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선관위 조사의 핵심은 ▶누가 보고서 작성을 지시했는가 ▶이 과정에서 보고서가 특정 후보의 유.불리를 위해 사용됐는가 여부다. 37쪽짜리 보고서가 모두 정부기관에 의해 이 후보의 공약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됐다면 공직선거법상 '공무원의 선거운동 기획 금지'와 '선거 중립 의무' 위반이 된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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