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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 저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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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주가지수인 다우존스를 만든 다우존스사의 100여 년 전 초창기는 요즘처럼 화려하지 못했다. 30세 안팎의 젊은 기자 셋이 1882년 뉴욕에 세운 이 회사는 7년 뒤 월스트리트 저널(WSJ)이라는 네 쪽짜리 신문을 창간했다. 하지만 운영이 어려워 기업 비리나 악재를 눈감아 주고 광고를 받는 일도 있었다(마키노 요, '나는 사람에게 투자한다'). 그러다가 배런이라는 언론인에게 회사를 넘겨 경영실적이 나아졌고 이를 상속받은 딸이 휴 밴크로프트라는 남자와 혼인해 지금까지 밴크로프트 가문이 다우존스의 주인으로 돼 있다.

WSJ의 사세가 급신장한 건 주식시장 활황이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오늘날엔 발행부수가 200만 부를 넘는 세계 최대의 경제신문으로 자리 잡아 투자자들은 물론이고 정.관.재계 인사들의 필독지가 됐다. '월가의 금융권력'답게 자부심도 대단하다. 폴 스타이거 편집인은 "뉴욕 타임스는 훌륭한 신문이지만 경제 뉴스는 (정보의) 향기 정도만 난다"고 평한 적이 있다.

이렇게 뽐낼 수 있는 배경에는 신속 정확한 인수합병(M&A) 보도, 퓰리처상을 휩쓸곤 하는 심층 취재를 꼽을 수 있다. 월가의 내부자 거래 관행(88년), 엔론 분식회계(2000년) 같은 역사적 특종 기사는 자본시장에 소금 같은 역할을 했다. 미국 밖의 곱지 않은 시각도 있다. 오마에 겐이치는 "미국 편향이 심하다. 뉴욕은 잘 보이는데 세계가 잘 안 보인다"고 비꼬기도 했다. 발행 부수가 수십만 부에 불과한 영국의 경쟁지 파이낸셜 타임스(FT)를 평판에서 압도하지 못하는 연유다. 그럼에도 WSJ가 월가의 아이콘으로 굳건히 자리 잡은 데는 비결이 있다. 편집권 독립이다. 뉴스위크는 '사주인 밴크로프트 가문이 신문 논조의 독립성과 품격을 침해하지 않는 걸 최우선 경영가치로 여겨 왔다'고 평했다.

'풍운아' 루퍼트 머독이 요즘 이런 WSJ를 들쑤셔 놓고 있다. 선정적인 콘텐트로 손님을 끌어 모아 뉴스코프라는 미디어 제국을 건설한 그의 손에 '명품 신문'을 넘길 수 없다고 기자들은 반발하고 있다. 숙적 FT마저 구원투수로 나설 태세다. 하지만 웃돈까지 얹어 50억 달러를 들고 덤비는 머독의 기세가 만만찮다. 100여 년 전 회사 존속을 위해 불유쾌한 일을 감수한 WSJ가 자본과 생존의 논리 앞에서 그간 쌓아온 품격을 얼마나 잘 지켜낼 수 있을지 이번 일은 시험 무대가 되고 있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